|긴/급/진/단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_이종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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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
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브리서 13:15)

이종연 목사/진명교회, 아틀란타신학원 교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그것을 나타내 보이는 방식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많은 사람을 내버리는 가운데 우리를 특별히 뽑아주신 사실입니
다. 그런 일을 역사에서 계시 가운데 보이시려고 지으셨고, 그 가운데 특별
한 법칙부터 일반적인 법칙까지 세우셨으며, 오늘날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가 되셔서 큰 능력으로 권세 있게 섭리해 나가십니다. 
이 모든 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일을 더욱 확증시키시고 구원받은 신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도록 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
하신 일 가운데 숨겨있는 것을 생각해볼 때, 하나님의 생김새로 만들어진 사
람들이 영원토록 이 땅에서도 바른 찬미를 드리는 삶은 마땅합니다.

1. 찬
미의 제사-입술들의 열매

찬송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리고 찬송을 받는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찬송을 가리켜 “찬
미의 제사”라고 알려줍니다. 이 찬미의 제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
한 것’은 구속 계시 전반에 대한 것, 신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한글 개역성경에는 ‘증거’라고 옮겼는데, 이것은 ‘신앙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그분께서 계시하신 구속
의 일에 관해서 가르쳐주신 모든 것,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한 그분 몸소, 사
도들을 통해서 또한 교회 역사에서 많은 교부들과 바른 선진들을 통해서 알
려준 모든 교리를 말합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은 입술들의 열매가 바로 찬미
라고 히브리서에서는 알려줍니다.
이런 일을 사람에게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목적하시지 않았습니다. 시편 19편
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
을 나타내도다.” 여기에서도 분명히 나와 있고, 욥기 38장 7절에서 하나님
의 계시 부분에 보면 “새별들이 하나님의 창조물들
을 보고 노래한다”는 말
씀에서도 뒷받침합니다. 하물며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
께 노래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 노래를 담을 그릇, 연장으로서 우리의 몸, 사지 백체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입술과 혀를 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의 노래를 드리는 것입
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집, 성전
이라고 한 말씀을 통해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것을 바울은 명백하
게 말씀합니다.

2. 일반은총과 찬송

아담이 타락한 다음에 버림받은 사람들인 유기자들의 후예 가운데, 카인의 
후손 중에 하나님께서 노래의 연장을 유발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서 하나님께서 미리 찬송할 만한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도 감추인 신비 가운
데 있는 일입니다. 비록 죄악 가운데 이지러져 있을지라도 넓은 의미로 일
반 은총에 속해있는 것을 우리는 익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을 기리는 가운데 늘 타락의 요소가 배어있기에 잘 알
아서 여러모로 살펴나가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의 계
시에 대해서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고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종교적
인 목적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건 교회적인 것이건 이것을 달성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를 크게 격하시킨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
다.
본문에 나와있지만 찬송이 ‘제사’의 성격을 갖는 것을 볼지라도 경건의 능
력과 두려움이 따라야만 합니다. 더구나 예배 가운데 한 요소로서 찬송을 생
각해볼 때 그 특색도 우리가 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귀합니까? 나같
이 더러운 입술과 내장을 가진 사람이 어찌 영광의 아버님을 또한 아버님의 
속성과 여러 가지 신비한 것을 기리겠습니까? 

3. 만인사제직과 찬송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 번째 나와있는 위대한 물음은 ‘사람이 사는 최
고의 목적이 뭔가?’ 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김이라고 
대답하는데 그중에 무엇보다도 찬송의 모든 것으로 즐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
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속 계시로 점점 억누를 길이 없는 감정과 신비한 관계 가운데 들어
섬으로 속죄 받은 확신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이 넘치는 사
람이라면 마땅히 
노래하게 됩니다! 세상도 기분 좋으면 콧노래를 부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
은 말하기를 음악으로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까지 하는 사람이 있
습니다. 노래는 세상에서도 대단히 놀라운 겁니다.
우리 모두는 신령한 면에서 사제들입니다. 직접 하나님께서 나에게 만들어주
신 입술, 전인격을 담은 몸으로 하나님께 나가서 드리게 돼있습니다. 사람
이 독창으로 부르는 것은 엄밀한 의미로 공교회의 찬미가 아닙니다! 또한 이
것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복음의 진보 가운데서 더 좋은 곡조로, 새로운 노래로 드리
고 싶어지는 마음이 늘 솟구쳐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인생의 목적
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감히 입술에서 찬송 소리가 나오지 않
고 원망의 소리, 저주의 소리가 나옵니다. 
적어도 구원에 속한 믿음을 갖고있는 사람이라면 복음의 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체 내용, 그 다음 그 말씀을 성령님께서 쓰셔서 깨닫게 하시고 이
끄셔서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교회의 지체
로서 그 백성으로서 경배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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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혜의 수단인 찬송

깔뱅 같은 경우 그가 쓴 기독교 강요 네 번째 책의 전체 제목이 ‘은혜의 방
도’ 입니다. 은혜의 수단으로써 교회와 거기 속한 것을 꿰뚫고 있습니다. 
시각이 깊고, 넓게 봅니다. 뒷날 조직 신학자들이 은혜의 방도[media 
gratae]에 말씀과 기도만 된다거나 성례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박
약한 사상들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은혜의 방도들 가운데 이 찬미, 하나님을 기리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이 바로 신국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면서 마땅히 
신국에 속한 모든 관(觀)들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는 것으로 결정납니다. 
그런 면에서 분명히 우리가 고백하고 믿는 바에 걸맞는 찬미를 늘 하나님 앞
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 성격이 어떻고 이제 내가 그 교회 지체로
서 드리는 찬송의 성격과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다른 은혜의 방도와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도리 전체를 점점 알아 간다면 엄청난 감동에 사로잡힙니
다.
이 찬송 하나만 하더라도 예배의 전체 요소에서 독립된 위치를 차지하면서
도 유기적인 연락을 갖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자

각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 가운데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가 
지금까지 나에게 알리셨고 지금 나타내 보이시는 됨됨이, 여러 모습을 헤아
리고 지난날들의 엄청난 획기적인 구속 역사 가운데서 옛 교회들이 불렀던 
찬송에 가만히 마음으로 귀기울이고 참여한다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나님
을 대면해야 마땅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끝나는 문제라
면 모르나 영원한 나라에서 계속되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돈주고 살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당일치기한다고 되겠습니까? 
젊은 날 심은 대로 이 다음에 나이 들어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차근차근 기
본적인 도리부터 배워나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미는커녕 
예배를 해치는 장본인이 됩니다. 그런 게으른 사람들이야말로 일반은총에 속
한 여러 음악 요소에 대해서 가다듬을 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산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한데 날마다 세상에서 전투 
가운데 이김을 맛보지 못하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이긴 증명으로서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감히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겠습니까? 아무 준비 없이 마음에 
깊은 기울
임이 없이 가락이라든가 노랫말에 대해서 새김질도 하지 않고 내
용 없이 형식에만 급급한 상태에서 믿음이 자라지 않고 예배 때 알맞은 것인
가 따져보지도 않고 시간 때우기 식으로 방법론에만 치우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5. 구속의 열매로서 찬송 계시

이사야서 42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
에서 그분의 찬송을 선포할지어다.” 여기 ‘영광’과 ‘트힐라, 찬송’이라
는 말씀을 평행으로 적었습니다. 이것은 뒷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룩하
실 구속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이 찬송을 드리도록 해서 하
나님께서 받으실 것을 이사야는 바라보는 것을 볼 때 그의 찬송 능력은 엄청
난 경지입니다! 
어떤 면에서 다윗보다 훨씬 풍성합니다. 계시의 역사에서 다윗보다는 수 백
년 뒤 사람입니다. 찬송에 능력 있는 다윗이 선지자의 안목으로 가르쳐주는 
하나님 말씀들을 보세요 엄청납니다. 이것을 볼지라도 찬송 한 번 제대로 
못 부르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고 있다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세상 음악가
같이 노래를 잘 하라는 말이 아니고 못해도 좋다
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구속으로 말미암아 찬송을 받으시고 또한 받도록 하시는 중보자로서 
일하시려고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 당시의 그 계시들을 보세
요! 천군 천사들의 노래로부터 메시아의 대망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의 찬
송을 보란 말입니다! 그때만큼 찬란한 빛이 앞서 있었던가 할 정도로 대단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후 주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셨을 때 또 발생한 일이 오순절입니다. 그때 예
루살렘에 새로운 교회가 탄생되면서 사귐의 한 가지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이 있습니다. 마침내 계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알지만 찬송에
서 찬송으로 꽉찼습니다.

6. 구속 사건에 나타난 찬송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바벨론 강변에서 나무에 악기
를 걸어놓고 울부짖는 사건이 시편 137편에 나옵니다. 이방 사람들이 조롱하
면서 “너 하나님 찬송 한번 해 봐라 들어봐야 되겠다, 비탄으로 잠긴 가운
데 어찌 찬송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뼈저린 고백입니다. 이 친구들이 평
소에는 그런 걸 몰랐습니다. 거짓된 제사,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
었는데 철저하게 
고통을 겪고나니까 찬송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패역한 유대교를 향해서 말씀을 들려주신 것 중에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로 앞으로 어떤 것을 대망하도록 하셨나 보게 됩니다. 이런 찬송 
계시가 구약성경에서 가장 현저한 것 중에 한 가지라면 또한 오순절날 성령
님의 강림에서 현저한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옛 언약들을 훑어볼 때 위대한 사건, 결정적인 구속계시를 내릴 때마
다 찬미로 고백했음을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많이 공부하게 됩니다. 예를 들
어서 구속적인 사건까지 동반합니다. 여리고 성을 격파시킬 때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한 영광을 받으시려고 찬송 소리로 난공불락의 그 성을 무너뜨린 
적이 있고, 개인적으로 미쳐 날뛰며 기름부음 받은 자인 다윗을 멸하려고 다
시 말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하던 미친 사울을 통해서 다윗이 수금을 타
면 깨끗이 자기 정신이 돌아오도록 하는, 사탄을 추방하는 데서도 하나님을 
기린 것을 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볼 때는 유치한 사건들입니다. 새 언약에서도 본질은 
마찬
가지입니다. 다만 훨씬 신령하게 산 제사로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나
님께서는 자신을 알리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십니다. 그런 만큼 오늘날
도 구약의 방식으로 찬송을 통해서 큰 능력이나 한 번 행사되어야 만 바른 
것인 줄로 알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찬양 신학교가 그런 것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왜 적절하게 손질하지 못하는지. 한국교회의 
능력과 신학은 얼마나 혼미합니까!
구약 성경을 세 가지로 나눠볼 때 ‘토라’보다는 ‘느비임’ 가운데 찬송 
계시가 현저하고, 실제 면에서는 ‘크투빔’이라는 시편 같은 시가서에서 찬
송 계시의 절정을 기록한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찬송의 중요성이 예배 모
범 가운데 순서를 살필지라도 얼마나 중요합니까. 
소위 프륄루드(prelude : 전주곡)부터 포스틀루드(postlude : 마지막 송영) 
후주곡까지 보면 전부 찬미입니다. 아니, 메시지 전파하는 것부터 해서 성경
만 해도 전부 다 운율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창조는 
신비합니다. 이런 것만 살펴볼지라도 우리가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바른 신앙
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7. 개혁파 신앙고백과 시편 찬송

신학과 신앙은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장로파들과, 신학과 신앙은 일치하
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범알미니안파들 소위 감리파들이 어찌 같은 통일
찬송가를 예배모범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쓸 수 있습니까? 도무
지 말이 안 됩니다. 분명히 두 나무가 있는데 뿌리가 다른 데도 가지나 붙잡
아매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신학을 무시하는 것이요 신앙고백을 중시하지 않고 노래 아닌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적어도 노래 가운데 들어있는 신지식, 하나님에 대
한 신관, 그분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그 가운데서 보여주시는 여러 가
지 속성들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해오신 모든 사역을 우리가 가만히 헤아
려볼진대 어떻게 그렇게 함께 부를 수 있습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들어서 이런 말하면 마음들을 닫아버
리고 마는 것을 볼 때 더욱 하나님의 심판이 가중될 뿐입니다. 심지어 진보
파에서는 전통적인 가락과 악기를 써야지 더 한국적인 바른 교회가 되지 않
겠는가 일견 주장하지만 이것도 인본주의입니다. 
왜? 그릇된 신학을 기반으
로 하고 만들어진 소산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면 한국 가락 중
에 각종 미신과 이방 신앙적인 요소는 안 들어 있습니까? 이건 기독교 역사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역사적인 개혁 교회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시편에 있는 말
씀을 노래하기를 어제나 오늘이나 늘 중심으로 삼고 계승해옵니다. 그 말씀 
자체를 좋은 히브리어 가락과 신령한 빛을 받아 같은 마음으로 찬양하면 됩
니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서양 음악에 대해서 일정한 공부를 필연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성악은 물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걸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로 계속 소화시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오늘
날 교회로서 찬송이 되도록 해야하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에 끝날 문제가 아
닙니다. 집에서 소위 음악에 관한 서적부터 공부해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적게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이 찬송에 있는 음악의 모든 악상부터 가사에 대
한 연구가 다 돼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 안돼 있으면 자칫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장애를 심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찬송을 지은 저자도 그런 식으
로 만든 건 아닙니다. 더 부지
런히, 더 좋은 찬송을 드릴 수 있기를 바라고 이것을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8. 그리스도의 고난과 찬송

본문에 ‘드린다’는 말씀으로 돼있지만 헬라 말은 아나훼뤠인[αναφερ
ειν] 입니다. 이것이 가정법으로 ‘우리 올려드립시다, 우리 올려서 갖
고 갑시다’ 라는 말을 썼습니다. ‘훼로[φερω]’는 ‘짊어진다’, ‘아
나[ανα]’는 ‘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찬송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요 또한 확대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신령한 유익을 하나님께
서 허락하시는 방도로도 쓰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도록 침착하게 만들고 또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안정 
속에 평화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언약의 효과를 공동의 고백으로 
찬미하는 가운데 분명히 나타냅니다. 시편에 나오는 “제사로 언약한다”는 
말씀이 있듯이 본문 보니까 찬미가 제사인지라 이것도 분명히 언약을 발판으
로 하고 공회의 고백 가운데서 발생하도록 돼있습니다.
본문 앞에 나오지만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찬미하는데 결정적인 
것 중에 한 가지입니다! 여기 성문 밖은 한 마디로 말
하면 나그네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 정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머리 둘 데가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라 너는.’ 어떤 서기관이 와서 뒤좇겠다고 했을 때 머리 둘 데가 없다는 말
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세상에 입을 것 먹을 것 잠잘 것이 있는 사람이 입술에서 찬송이 나옵니까? 
어림도 없어요! 아무리 호화찬란한 궁정에 살지라도 우리 마음 자세가 과연 
어떤가 하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선 아예 그 몸으로 거룩한 제사를 드리셨어
요! 
‘우리에게 주신 바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께 나가는 자가 아
니고서는 찬송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치열하게 또한 간절한 말로 당부하
는 가정법을 써서 “위로 갖고 갑시다” 이런 당부입니다.

9. 최고의 예배, 드림의 절정인 찬송

여기 ‘제사’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희생이라든가 또는 순결, 드린다 또한 
마침내 사귄다 하는 분명한 성격들이 제사에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찬미 가운데 분명히 배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겁니다. 
드림이라는 정상에 
서있어야 찬미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도 헷갈리
고 하나님에 대한 영광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누구한테 어떻게 어떤 식으
로 찬송을 드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모욕과 갖은 시
련을 당하셨는데 피흘리기까지!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분명히 말씀하십
니다.
이런 섬김의 한 방편으로 찬송을 드리게 돼있습니다. 피흘리기까지 전투에 
참여함이 없는 사람은 찬송할 수 있는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뭘 갖고 합니
까 바른 삶이 없이! 호세아 14장 2절에 혹독하게 당시 타락한 교회를 책망하
는 것 중에 “말씀을 갖고 여호와께 돌아오는데 모든 불의를 제하고 선한 바
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해서 주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말씀을 볼 때 수송아지보다 입술을 갖고 전인격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을 호세아 선지자도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최고의 예배요 어떤 면에 드림의 절정
으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 드림을 하면서 찬미를 드
리지 않습니까. 이런 찬송에 대한 계시에서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이름 이것을 바탕 삼아서 
하나님께 열매로 드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 가운데 그분으로 말미암아 중보자께서 찬송에 어떠한 위
치를 차지하며 또한 그분에 대한 앎이 찬미의 대상인 하나님께 나가는 데 얼
마나 중요한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