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한국교회의 주일학교, 그 미래의 전망과 대안
양승헌 목사
·세대로교회 담임
·파이디온 선교회 이사장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1. 요나단 신드롬
우리 교회 교육의 현장을 관찰하면서 나는 요나단 신드롬이라는 용어 하나
를 만들어 냈다. 요나단 신드롬이란 말은 사사기 19장 30절에 나오는 모세
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이라는 이름에서 착상이 된 말이다. 사사기 기
자는 사사 시대의 흑암을 우리에게 실감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 당시의
사회상을 대표하는 두 편의 이야기를 사사기의 권말 부록으로 실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윤리적으로 부패했는가를 단적으
로 보여준다. 두 번째 이야기는 그 당시 사회의 어두움이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과 배교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교회 교회학교 교육의 현장을 깊이 살피면서 나는 우리 교회 역시 요나
단 신드롬에 이미 감염되어 있음을 인식하며 서구의 많은
교회와 같은 렛슨
비를 지불해야 하지 않나 착잡한 마음이 든다. 어린이들은 설교와 성경공부
에 식상해 있다. 많은 교회 현장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기뻐할 소식은 “오늘
은 분반 성경공부가 없습니다”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교회는 아이들이 너무나 교회에 오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먹을 것을
사주는 것으로라도 아이들을 끌기 위해 주일 먹거리 비용으로 월 얼마씩 정
식 예산을 잡아 쓴다는 말을 들었다. 교회에는 더 이상 불신 가정에서 나오
는 어린이들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한숨쉬는 사역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
다. 교인들의 자녀들 역시 교회생활에 너무 익숙하고 너무 식상해서 오히려
교회 교육에 방해와 훼방세력이 되어버리는 영적 경화 증세가 번지고 있다.
교사들은 열매가 적은 사역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좌절감과 부담을 안고
씨름하고 있다.
주일학교는 지난 30년 간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채 아는 새 모르는 새 냉각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욱 민망한 것은 이럴 때 우리가 무엇을 어떻
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조차 파악되지 않는 막막함과 무기력함을 느낀다
는 것이다.
2.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
는데…
조지 바나가 쓴 책 중에 솥 단지 속의 개구리(A Frog in the Kettle)란 책
이 있다. 한 대학 실험실에서 개구리의 신경반응 실험을 했는데,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 튀어나오지만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해가면 개구리는 상황의 변화를 느끼지도 반응하지도 못
한 채 삶아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개구리 이야기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바
로 우리, 우리 교회의 이야기를 보는 듯 싶어 안타깝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별 의식 없이 세상의 상대
주의 사상에 젖어 들고 있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처럼 우
리의 다음 세대들은 절대 도덕, 절대 선, 절대 신, 절대 종교, 절대 심판
등 기존의 절대 관념을 비웃고 상대화하는 세상을 숨쉬고 있다.
멀티미디어와 대중문화가 퍼붓는 치밀하게 계산되고 생각을 사로잡는 ‘메시
지’들을 통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
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그 가치의 중심을 옮기고 있다. 모
든 가치, 모든 사상, 모든 원리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배격하고 삭제하고 무
시하는 세속화의 전염병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의식 속까지 깊이 자리잡고
있다.
3. 주일학교는 뭣하고 있나?
한국교회 주일학교는 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믿을만한 통계조차 없는 것
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한미라, 개신교 교회교육. 대한기
독교서회, 2005) 2004년 한국교회 주일학교 학생 수는 5,093,05명으로 전체
개신교 교인 수인 18,727,185명의 27%로 계산되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 중
어린이가 약 52.7%, 청소년들이 26.3%, 청년대학부가 21%라고 한다. 이것은
17년 전 (1987)과 비교해 볼 때 충격적인 수치가 된다.
1987년 개신교 주일학교 학생 수는 전체 개신교 교인의 거의 반 수에 육박하
는 규모이었으나 1994년에는 전체교인의 32%로 줄어들었고, 2004년에는 27%
로 줄어 들은 것이다. 허기야 믿는 집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이전처럼 불
신 부모의 핍박과 방해 속에서 교회에 나오는 주일학교 학생 수는 자꾸 줄어
드니 이런 결과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동안 전도의 흡입구 역할을 하던 주일학교의 기능은 그 교회 성도들의 자
녀들에 대한 신앙교육기관으로 전락해 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상
태로 가면 30년이 지나지 않아 우리 교회는 숫자적으로 크게 감소될 것을 예
측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숫자가 적은 대신 질적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하는가? 그렇게 말하
기 어렵다. 우리는 학교의 교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주일학
교 교실이 이미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잘 듣지 못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
우할 생명 같은 진리가 가르쳐져야 할 성경공부는 재미없고, 지루하고, 삶
과 멀리 떨어져 있고,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낭비라는 생각과 이어지는 현실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성경이 큰짐이 되고,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해
야 할 하나님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교회 고등부 출신들이 그 교회 대학 청년부로 이어지는 비율이 30%정도에 머
무는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아이들이 생각하는 주일학교는 얼마나 매력 있
고,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의미 있는 곳인가?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이와
안 다니는 아이는 ‘종교’란에 ‘기독교’라는 적어 넣은 점 외에 그에게
서 체감되는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엇일까?
4. 이런 주일학교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
주일
학교의 현실에 대한 자성과 고민은 우리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미 미국
에서도 휩쓸고 지나간 주제들이다. 학자들의 의견은 폐지론과 옹호론과 개혁
론 등 대체로 셋으로 나뉘어진다.
그 중 주일학교는 이대로는 안되고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개혁론이
다. 린과 라이트 같은 학자들은 주일학교는 여러 가지 불합리와 부족에도 불
구하고 주일학교는 작지만 큰 학교(the big little school)로 존재하여야 한
다고 말한다. 물론 필자의 의견은 세 번째이다.
5. 주일학교의 기능을 확실하게 지키라
그러면 뭘 어떻게 고치란 말인가? 무엇인가 변화를 계획한다는 것은 보수적
인 우리네 교회에서는 환영보다 염려가 앞서는 일이다. 우선 구조
(structure)와 기능(function)을 구별하는 데서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구
조는 틀이나 그릇이라면 기능은 내용이며 구조가 실제적이라면 기능은 원리
적이고 구조가 가변적이라면 기능은 변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운다. 신학적 용어로는 구속
과 성화, 영적인 용어로는 성장과 성숙, 교육적 용어로는 변화 혹은 회복 또
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 등 여러 말로
표현이 갈리지만 본질은 같다. 타락으
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육은 해왔으니까
하는 것도, 남들이 하니까 하는 것도,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것도, 교세
를 확장하기 위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교육의 목표는 분명하고 단순하다.
즉 인간회복이다.
안토니 훼케마 교수의 구분대로 하나님 형상의 구조, 즉 타락으로 손상된 육
체적, 지성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구조를 회복하고 하나님 형상
의 기능,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
이 지으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세계를 사랑하는 관
계적 기능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주일학교에서 이루어야할 일이다. 이것은 결코 변질되거나 포기되어서
는 안 되는 주일학교의 기능이다.
6. 주일학교의 기능을 막는 모든 구조를 바꾸라
1) 학교구조에서 가족구조로
주일학교는 예수님이 만드신 기관이 아니다. 헬라 사람들이 세계를 정복하
고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짧은 시간에 다량으로 전수하기 위해 만든 교육기
관이다. 예수님이 당시 편만한
학교제도의 편이성을 다 아시면서도 학교를
세우지 않으신 것은 학교가 갖는 기본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학교’라는 이름이 갖는 너무도 선명한 그림 때문에 주일학교가 믿
음의 공동체로 변화되는데 큰 걸림이 되는 것을 보며 아예 ‘예수마당’으
로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조직도 1학년 2학년… 이런 학년별 학급조직
을 버리고 1학년에서 3학년을 섞어 반을 구성케 하였다. 그러자 주일학교 안
에서 형이라고 부를 관계가 생기고, 챙기고 보살필 동생이 생기는 흐뭇한 광
경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능한 학년끼리, 부서끼리 모이고 배우는 구조를 없애지 않더라도 전세대
가 함께 예배하는 장(all age worship)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큰 교회 같으
면 부활절, 교회생일, 감사절, 성탄절 같은 특별한 날만이라도 전가족 예배
를 시도함으로써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교회의 한 가족된 공동체성을 확인하
고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의 믿음과 의식과 가치를 전수받을 수 있는 구도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2) 주일학교 중심 교육구조에서 부모와 함께 하는 교육구조로
인간은 프로그램으로 자라거나 변화되지 않
는다. 프로세스가 중요하다. 한
사람 속에 하나님께서 프로그램 해 넣으신 내적 잠재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잠재력이 개발되는 데는 인간 정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린이가 걸어가
야 할 평생 순례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 요인은 부모이다. 나이가 어
릴 수록 이 영향력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결정적이다.
불행하게도 현시대의 가치관을 형성해주는 요인은 부모가 아니라 텔레비전이
라는 점에서 부모를 통한 크리스천의 가치확립은 한 사람의 평생에 치명적
인 역할을 할 나침반을 어린이 마음속에 내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 아
닐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부모는 자녀의 영적 성장과 성숙에 대
한 책임을 교회에 미루어 놓고있고 교회는 그 책임을 떠맡고 있다.
한국교회 교육의 가장 큰 실수는 기독교 교육의 장을 가정에서 교회로 끌어
낸 것이었다. 주일학교는 부모의 대체 기능도 아니고 부모와 경쟁하는 관계
도 아닌 보완하는 관계이다. 모든 부모가 다 성숙한 것도, 자녀를 믿음으로
잘 양육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일학교의 기능 중에 하나는
부모들이 그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다. 특히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이러한 기능은 더 중요하다.
3) 사실 이해 성경공부 구조에서 삶의 변화 성경공부 구조로
우리 사회의 환경은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었다. 그러
나 한국 교회 주일학교의 교육환경이나 교육에 대한 이해나 교육 방법들은
지난 30년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학생들에게 교회학
교는 지루하고 낙후된 교육의 장이라는 인식이 기정화되고, 성경공부는 자신
들의 삶의 정황과 거리가 먼 다른 세계의 활동처럼 느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전통은 그것이 교회학교의 기능을 유지시켜줄 때까지만 의미가 있다. 지금까
지 그렇게 해왔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오는 그 방식이 교회학교의 기능에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심지어 저해하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기를 고집할
때 교회학교의 교육의 현실성, 동시대성, 상관성은 손상당하는 것이 되고 만
다.
무디의 말대로 성경은 정보(information)를 위한 책이 아닌 변화
(transformation)를 위한 책이다. 감히 도전하고 싶다. “성경을 가르치지
말고 성경으로 사람을
가르치라”고. 성경의 진리는 명제적이 아닌 실존적으
로 가르쳐져야 한다.
학생들이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의 가슴 깊이 내면화된 나침반처럼 성경의 진리가 의식화
(conscientization)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설명과 암송으로는 부족하다. 학생
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 배울 수 있는 활동학습, 모형 교육(simulation)
을 향해 성경교수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4) 목회와 교육의 이원화 구조에서 목회와 교육의 통합 구조로
무슨 근거로 목회와 교육을 이원화하는 것일까? 목사의 설교, 목회, 가르
침, 보살핌의 거의 모든 사역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교육적 사역이다. 바울
이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목
사라는 부류와 교사라는 부류를 별도로 두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목사-교사,
목사 즉 교사를 두셨다는 뜻으로 이야기하였다.
목사의 사역은 교육적 사역이며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사역은 반
드시 목회적이어야 한다. 오히려 목회도 교육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르는
전 생애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일련
의 과정으로서 목회가 윗판
이라면 교육은 밑판을 이루는 합판과 같은 통합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
야 평생토록 이어질 (life-long education) 교회 교육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
5) 어린이 교육 구조에서 전 생애 교육 구조(Life cycle education)로
우리 주일학교 교육 구조의 큰 약점 중의 하나는 한 사람의 생애를 전체적
인 틀 안에서 보고 양육하는 일관성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프로
그램이 아니라 프로세스, 과정이다. 우리 교회의 교육 목표는 한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과정이 평생 계속 되도록 돕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
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로마서 8:2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
니”(갈라디아서 4:19).
우리는 인생의 시작인 신혼기에서 시작해 아기를 낳아 키우고 결혼시켜 분가
시킴으로 다음세대의 나선형 사이클이 시작되게 한 뒤 물러서는 우리 인생
의 계절을 총체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생의 계절들
을 통과하며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으로 변화되고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이 평생 그를 따라 돌아주어야 한
다.
지금까지 주일학교 하면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부서로 불려 왔다. 그런데 청
소년으로 자라가면 주일학교 이름은 없어지고 중고등부, 대학부 등으로 명칭
이 달라진다. 주일학교는 어린이용인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에서 1940년대와 1950년대 교회교육의 초점은 어
린이들에게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청소년에 그 초점이 옮겨갔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장년교육으로 그 초점이 달라졌다. 이러한 초점의 변
화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주일학교
는 전 생애 동안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가는 교회교육의
연속적인 장이어야만 한다.
특히 주일학교의 장년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 한국교
회의 교육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선교초기 교회로 밀려오는 성년 불신자,
초신자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이 목사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주일학교의
장년부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이 시기가 우리 어린
이들이 가장 좋은 기
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구조를 교회가 제공하였다고 생각된다.
진지하고 열성적인 장년 성경 학습이 여러 날 걸친 사경회나 성경 구락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때 소위 ‘은혜’를 받은 장년들이 그들이 배우고 받은
것을 가장 먼저 전달하고 실습할 수 있던 장과 대상은 가정과 자녀들이었
다.
부흥 지상주의로 약화되었던 주일학교의 장년 교육이 활성화되지 않는 한 주
일학교는 그 힘을 회복하기 어렵다. 장년 교육을 통해 엄마 아빠,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건강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일은 건실한 유치
부, 유년부, 중고등부 교육을 세우는 기초가 된다. 장년부 주일학교는 전체
주일학교의 심장이다.
6) 상식적 교육구조에서 전문적 교육 구조로
위에서 말한 모든 과제를 풀어갈 고리는 ‘사람’을, 교육 전문가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회 교육의 구조가 설 수 있고, 이러한 구조가 서야만 비
로소 교회교육의 전문성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이 쓰는 속
된 말 중에 That’s Sunday school stuff! 라는 표현이 있다. Oh, my God!이
‘오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 아닌 것처럼 이 말은 뭔가 시시하고 비전문적
이고 질이 낮은 경우를 일컬을 때 내뱉는 말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일학교 출신들이 주일학교에 대해 갖는 느낌
역시 별 차이 없다. 주일학교를 시시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 어린아이
눈에 비친 주일학교가 시시해지면 그의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교회도 그에게는 다 시시한 것으로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
이다.
한국교회 교육의 개혁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어야 할 사람들은 교육 전도사들
이다. 교육전도사들은 한국교회교육의 현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긍정적,
부정적 양면에서 해왔다. 열악한 교육여건 속에서도 한국교회 교육의 맥을
이어온 실질적인 공로는 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교육전도사제도가 끼친 역기능적 요소도 적지 않다. 신학교에 들어가
기만 하면 그날로 그 사람의 호칭은 전도사가 되고, 그의 손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이 위임되는 것에 별다른 이의가 없는 듯 싶다. 의학대학에 합격
했다는 이유로 수술 칼을 잡게 하는 병원은 아무 곳도 없다.
은사와 소명과 관계없이 신학교를 입학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어
린이나
청소년과는 별 은사도 소명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교육부서의 전도사가 된
다.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이 사역을 위한 도움과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
는 현실에서 많은 전도사들은 고민하며 갈등하며 괴로운 시기를 보낸다.
괴로운 것은 전도사들뿐만이 아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어리
다는 이유 때문에 1년이 길다고 자주 바뀌는 지도자들의 현장 사역 실습 대
상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어른
성도들을 섬길 목회자들을 키우기 위한 목회 실습 대상일 수는 없다.
더욱 손해를 보는 것은 한국교회의 교육 수준이다. 적절한 어린이 사역의 훈
련을 받을 기회가 없는 사역자들은 소명과 은사가 있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지라도 그의 사역을 상식과 어린 시절의 자기가 받은 주일학교
경험에 근거한 교육 정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한국교회 주일학교 교육의 퇴영성이 극복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주일학
교가 목회자가 되기 원하는 이들의 목회 실습, 설교 실습장으로 사용되는 것
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값싼 인건비로 이 중요한 사역의 자리
를 메우
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왕국의 일꾼이 될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학업에 전념하고, 자신의 은
사와 소명을 발견할 수 있도록 교회 사역 전 영역에 걸친 인턴과정을 제공하
며, 사역의 조건이 없이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세워주어야 한다. 대신, 교회
교육을 위해 특별한 소명과 은사가 있는 사람을 교육목사를 세워 전적으로
교회 교육만을 관할하게 하고, 인턴중인 교육 전도사들과 전문 교사들을 훈
련 감독하게 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러한 교육목사나 교육사들이 양육될 수 있도록 교단들이나 신학
교들이 공동으로 투자하고 관리하고 공인하는 교육 전문 지도자 양성과정도
마련되어야만 한다.
이 훌륭한 자원인력을 계발하고, 그들에게 사역의 모델을 제시하며, 그들이
훈련될 현장을 연결하고, 사역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도, 상담해
줌으로써 한국교회 주일학교를 건강한 방향으로 유도해 나갈 전문 훈련기관
이 시급히 필요하다. 교육목회, 목회적 교육 이 둘을 통합하고 실현시킬 전
문 인력을 세우는 데서 우리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우리가 미루는 것만
큼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커진다.
나가는 글
달라스 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는 기독교 기관이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관찰했다. 첫째는 가슴에 확실한 비전과 뜨거운 열정을 가
진 사람(Man)으로 시작되고 그 다음에는 그런 비전과 열정에 동조하는 사람
들이 합세함으로 운동(Movement)으로 발전되고, 그 다음으로는 구태여 비전
과 열정을 동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는 기계(Machine) 단계로 돌아가다
가, 결국 과거의 찬란한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비(Monument) 단계로 끝난다
는 것이다.
헨드릭스 교수의 이러한 관찰은 우리 교단이나 우리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
가 크다. 기독교 문화를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기독교 후기 사회 증세를 보
이는 우리의 현실을 느낄 때 한국 교회 주일학교의 과감한 변화와 개혁은 결
정적인 이 시대의 하나님의 요구로 생각된다.
요나단 신드롬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과 변화의 몸부림을 우리 모두가 서둘러
야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 교회
의 지도자들, 교육 지도자, 교사들이 지금 우리 교회가 요나단 신드롬의 초
기 증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문제
의식을 느끼도록 일깨워야 하는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