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특집| 나귀 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 (막 11:1-11)_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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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특집

나귀 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
(막 11:1-11)

이광호 목사_실로암교회, 홍은신학연구원 교수

시작하는 말

예수께서는 역사상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부근까
지 오셨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외견상의 이유
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감
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도착하신 것은 이전의 방문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
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천상
의 왕이 세상의 왕들에 의해 완벽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처
형된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 놀라운 사역을 위해 지금 감람산에 도착
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앞으로 세워지게 될 교회의 기초이며 기둥들이다. 이번 유
월절이 이전과는 의미가 다른 특별한 절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 자신
이 가장 잘 알고 계셨다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된 제사장들의 사역
을 통해 성전에서 어린 양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했던 그 상징적 일들
이 드디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눈앞에 닥친 것이다. “세
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 예수께서는 친히 성전
과 제사장과 제물이 되어 단번에 자기 몸을 희생제물(히 9:28)로 드림으로써 
유월절의 의미를 완성하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
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공개 수배하고 있는 상태
였으며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발
생할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요 11:55-57).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감람산 주변에 있는 조그만 동네에 도착하셨다. 우리
는 여기에서 악한 자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왕으
로 입성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결연한 모습을 통해 가슴 조이는 긴장감을 느끼
게 된다. 
1. 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했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의 땅 중심 자리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 곳에 있는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
쳤으며 그곳에서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사사시대를 거쳐 약속의 가나안 땅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점령
한 고지는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얻
게 된다.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
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이 성취되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일차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써 역사적 증언의 역할을 한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이동식 성막(the Terbernacle)을 아브라함
이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the Temple)으로 건립하여 
정착시킴으로써 그 언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사건은 마태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한 왕’의 지위를 가지고 입성하
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
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거룩한 성전을 장악하여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두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
께서 왕으로 입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 과정에 
놓여 있다. 이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는 것이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했
던 그 사건이 구속사 가운데 완성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2. 나귀 새끼를 끌고 오도록 명령하신 ‘왕’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허락과 무관하게 나귀를 끌고 오도록 명령하셨
다. 그는 제자들 중 두 사람을 건너편 마을에 보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도록 명령하신다. 본문을 보면 그 나귀는 주인이 있는 나
귀 새끼인데 주인의 허락과 관계없이 그냥 매여있는 끈을 풀고 끌고 오라고 
요구하신다. 본문에는 주인의 허락을 받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
로 나타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신 의도와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나귀 새끼가 필요하다면 주인의 양해를 구하거나 사전 허락을 받아 
끌고 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절차에는 아랑곳없
이 그냥 
끌고 오라고 명령하신다. 물론 그 광경을 보는 누군가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그 나귀의 주인이 허락할 것이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주님’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지칭하지만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다. 
제자들이 건너편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을 때 어떤 사람이 
왜 남의 나귀를 허락도 없이 끌고 가느냐고 따졌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답변했으며 그 주인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을 허락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
다. 
첫째, 우주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만물에 대한 절
대 주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우주 만물이 주님의 것임을 무언의 
방법을 통해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할 사람은 없다. 
둘째, 당시 일반 백성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
람들이 이미 많았음을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확증해 보여주고 계신다. 이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역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본문
에서 “주가 쓰시겠다”(막 11:3)는 구절에서 ‘주’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의 주인에게 그 말을 했을 
때 그 주인은 예수께서 그 나귀 새끼를 사용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
었다. 

주님께서는 그때 특별한 방법을 통해 그 주인의 마음을 감동함으로써 자기의 
나귀를 내어주게 했다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에 메시아
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제자들 가운데 보여주셨음을 알 수 있다. 즉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고 말했을 때 그 주인은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
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약속
의 민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고 있었다. 메시아 대망 사상과 예수님이 곧 그
리스도라는 사실이 일반 백성들 가운데 인지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주
고 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적 교훈을 통해 선포의 의미와 더불
어 아직 불안감에 싸여있는 제자들을 격려 하셨다. 

3. 왜 나귀 새끼였을까?

왜 성
숙한 큰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였을까? 왕으로 나귀를 탈 것 같으면 
이왕이면 힘이 세고 성숙한 큰 나귀를 타면 더 낫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언약 성취와 관련이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
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
셨을까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에 따른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
각 때문이다. 다수의 신학자들은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자 했던 것은 
아직 사람들이 타지 않은 순결한 나귀였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
다. 학자들은 대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
것은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는 나귀가 죄인인 인간들이 탄 적이 없는 순결한 
나귀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
닌 것 같다. 
나귀 새끼라는 말은 아직 사람이 탈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어린 

나귀라는 뜻이다. 즉 나귀의 순결성보다는 연약성에 더 분명한 초점을 맞추어
야 한다. 예수께서는 크고 튼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
니라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새끼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입
성하셨다. 
만일 당시 로마의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했다면 평범한 촌부(村夫)들이나 
타고 다니는 나귀가 아니라 크고 늠름한 백마나 쌍두마차를 타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황제의 말은 금빛 나는 화려한 안장을 갖추고 그의 앞에는 값비
싼 양탄자가 길게 깔릴 것이다. 늠름한 군인들이 웅장한 도열을 하고 행사장
에 동원된 시민들은 황제의 이름을 연호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대제국의 황
제들은 자신의 위용 과시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나귀 새
끼를 선택해 타셨다는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위용을 갖춘 화려한 왕
이 아니라 초라한 왕의 모습으로 입성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상식적
인 안목으로는 결코 그를 참 왕으로 알아볼 수 없음을 일러준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천상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힘없는 어린 나귀를 타셨다는 것
r
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권위를 갖추지 않으셨음을 보여주고 있
다. 그가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일시적으로 비치는 그런 위용이 아니라 성
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이끌어왔을 때 그의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새끼 나귀
의 등에 걸쳐 소박한 안장을 만들었으며 많은 일반 백성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왕의 길에 깔아 양탄자를 대신했다. 번쩍이는 칼과 창을 위용 있게 갖
춘 용맹스런 군인들이 연도에 도열하는 것 대신 여기저기서 몰려온 시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자유롭게 흔들며 승리의 왕을 환영했다. 그런 초라한 
모습의 왕을 참 메시아로 알아보는 사람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밖에 없었
다. 
여기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수배중인 죄인을 왕으로 환호하는 시민들
은 그것 자체가 이미 반정부적인 범죄 가담 행위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영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이다. 길가에 서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
는 무리들은 막연한 즐거움에 취해 떠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담보로 

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 

4.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와 ‘다윗의 나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의 목적
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을 정복
했던 다윗 왕가(王家)의 자손으로서 왕의 대를 잇는 영원한 왕 곧 메시아를 
의미한다. BC 586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다윗으로부터 시
작된 왕의 대가 끊겨진 상태에서 이제 영원하고 참된 왕이신 메시아가 예루살
렘에 입성하고 계신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9절)라는 말과 ‘다윗의 
나라’(10절)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에서 ‘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다. 예수께서는 사
탄의 유혹으로 인해 죄와 사망에 빠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약속(창 
3:15)하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다. 
이스라엘의 평범한 백성들은 ‘다윗의 나라가 온다’는 민족의 노래를 하고 
있다. 다윗의 나라 곧 다윗 왕국은 영원한 언약의 나라이다. 그 왕국은 세상
의 다른 국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이
다. 그 왕국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한 나라이다. 이스라
엘 백성들은 바로 그 나라의 왕이 오심을 알고 환호하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
렘의 왕으로 등극하는 메시아의 왕국이 옛 왕국을 정복하게 됨을 언약 백성
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 성
의 의미가 완성됨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실 때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몰랐을 리 없
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공개 수배 
중이었으며 공직자들이 예루살렘을 엄격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
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몰려든 백성들로 말미암아 떠들썩하게 된 예수님
의 예루살렘 입성을 모를 수 없었다. 연도에 선 시민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
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0)를 외쳐댔다.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
나!”(한글 표준새번역). 

메시아를 알아보고 ‘호산나’를 외쳐대던 일
반 백성들은 영원한 ‘다윗의 나
라’의 회복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동원한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백성들이었
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영하는 것은 기존 권력자들에 대
한 모반에 가담하는 반역 행위였다.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
던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도리어 죄인으로 간주하여 그를 체포하려 했다. 

마치는 말

평범한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를 찬양하
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
들은 그 메시아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을 둘러 보셨다. 그 성전
은 하나님의 집, 곧 주님 자신의 집이었다. 
당시에는 유월절을 앞두고 이미 여기저기서 몰려든 유대인들로 인해 성전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때였다. 예수께서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도 제자들과 함
께 많은 백성이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겉옷을 벗어 양탄자를 대신하여 도로
에 깔고 ‘호산나’를 외치던 그 무리들이 일순간에 다 흩
어져 집으로 돌아
간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배중인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당국이 그
를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그로 인한 일반 백성의 소요와 민란을 우려했기 때
문이다. 사실상 그들은 이미 반역의 대열에 들어서서 유대 지도자들을 압박하
고 있었다. 나중 유대인들이 사람들이 많지 않은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을 체
포한 것은 일반 백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께서 지금 성전을 둘러보시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
라 자신과 성전의 일체됨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확
인하며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가
지는 의미의 본질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사역을 앞에 두고 성전에 들어서셨음
을 알 수 있다. 
왕으로 입성하여 성전을 둘러보신 주님을 통해 우리는 천상의 왕으로서 아브
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자신의 왕권과 일치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
님이 왕으로 등극하신 것은 일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과 연관
된 우주적 영원한 왕이심을 자기 백성 가운데 보여주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