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자수련회특강
“성화의 신비”
박영선 목사|남포교회
■ 이 원고는 2005년 5월 17일 총회교직자 수련회에서 박영선 목사(남포교
회)가 ‘성화의 신비’란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을 박병선 목사(인천 동부교
회)가 발췌, 요약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편집했다.
이 강의는 구원에 대한 불분명한 이해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들
을 잘 지적하고 있으며 마땅히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정형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 과정에서 원 강좌의 취지를 모호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강의 요지만을 담고 있어 강좌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일반적으로 인재와 비교해서 뛰어난 자를 천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
의 세계 안에서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바로 천재입니다. 즉 하늘의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천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
심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우리 모
두에게 혜택을 고르게 하기 위해 주셨다
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은사를 받은 우리
는 천재라고 일컬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성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거룩한 신앙 생활을 하
는 것으로 일상의 삶에서 신앙으로 승리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 평생의 고민거리입니다. 여기에서 “왜
승리하지 못하는가? 왜 승리에 대한 응답이 없는가? 뭐가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 추구가 신앙의 고민거리
이와 관련해 로마서 6장 1절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질문은 구원
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했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
면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지도, 기
대하지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 질문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없다면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원인이 있
다면, 즉 나는 믿었다, 회개했다, 결단했다 등
등, 이 질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구원을 경험했다면 이 질문,
“그럼 난 뭐란 말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가져가거나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주시니 그저 받기만 하라고 하는데 사실은 받을 능력조차도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럼 이게 뭐냐?” 하는 이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조차 분별할 능력 없어
그래서 2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
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
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
니라”(롬 6:2-4). 이 말씀의 요지는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 가운데 살
게 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일반적으로 구원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1절의 질문
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
은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살
펴보면 십자가로 대변되는 구원에 대하여 구원을 칭의로만 잘못 생각하고 있
다는 것에서 이 질문의 핵심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이란 칭의만으로
끝나지 않고 “새 사람은 새 생명을 가지고 커가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는
이것이 바로 구원이란 것입니다.
구원은 새 생명을 발현하는 것
1절은 칭의로 구원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고, 2절 이하는 새 생명을
가진 성도가 되었으니 새 삶을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
니다. 즉 구원은 구원받은 감격과 더불어 그에 따른 책임이 함께 동반되는
신앙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후반부에서는 구원받
은 성도를 가리켜 “네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롬 6:13)고 말하고 있습
니다.
구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를
근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런 이유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
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에서는
십자가를 근거하여 사는 삶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3, 4장에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이
어 정리하기를 5장 1절에 와서 구원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라고 정
의합니다. 그리고 2절 이하에서는 바라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성화와 영화입니다.
칭의, 그 이후에 남아 있는 ‘성화’
이와 관련해 9,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
과 화목을 주신 메시아 사역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구원 사역이라고 합니
다. 그리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셔야 할 메시아 사역이 있다는데 이
것도 구원 사역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과 그리고 부활로 말미
암아 구원을 이루신다고 합니다. 즉 십자가로 우리와 연합하여 ‘죄에서 건
져낸 구원’이 있으며 동시에 부활로 우리와 연합하여 ‘살게 하시는 구원’
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내가 이제부터 은혜를 갚으며 살
리라!”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낳으실 뿐 아니라 기르
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지나가야 합니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식을 향해 “내가 너를 낳았으니 나가서 돈 벌어 오거
라”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무
엇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아집니다. 그보다 더 중요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불
안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라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소극적이 되고 말았
습니다.
하나님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앞에서 구원의 천상 사역을 설명하
고, 축하하고, 감사하고, 찬양한 후 즉 “구원을 전제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
여 기도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 지 알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구원의
목표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을
전자의 것으로만 알고 익숙해 있습니다. 이 부분만 강조
하다 보면 그 이후의 영광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그 내용이 18절입니다. 너
희가 받은 그 구원이 가져다 주는 영광이 어디까지 가기를 원하는지를 알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
다면 그것은 구원과 그 영광을 얻기 원하신 것이며, 그 영광이 어떤 과정을
거쳐 되는가에 대해선 1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십자가를 지신 동
일한 능력과 그 사랑으로 영광도 얻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해를 하게 되면 교회를 선교를 위한 캠프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가정과 같지 않고 군대와 같게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생명이 커
가는 곳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가고 용서하고 이해 받고, 잔소리가 있는 그
런 곳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교회가 군대같이 획일화 되어선 안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 사도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신다’는 말의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계속 살고 계신
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으셨고(완료형)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사신다(미완료형),
계속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신앙 생활의 근거입니
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
을 실천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
께서 사신다(미완료형)는 것은 계속 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의 완성
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묶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왜 안 되는가? 왜 우리의 기대만큼 승리를 이루지 못하는가? 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인가? 그래서 철야 기도하고 금식을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
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
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신 이 말씀은 성화
의 최고 근거
인데, 그렇게 믿고 기도하는 데도 안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어야
여기서의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믿음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믿음의 영웅들은 어떻게 믿음에서 승리하였는가를 추적해 보고자 하
는 것입니다.
믿음의 영웅이라고 하면 당연히 다윗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골리앗과
의 전쟁에서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용맹(삼상 17:45-47)은 모든
성도의 이상이고 면류관이고 이상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런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다윗의 형들처럼 도망가기에 바쁘기만 합니다.
왜? 우리가 다윗보다 기도가 부족한 것인가? 열심이 부족한 것인가?
그런데 가장 영웅적인 다윗의 이 모습에 대해선 성경은 한번도 다시 언급하
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시편 40편에서와 같이 밧세
바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기가막힌 웅덩이에 빠져서 하나님
께 부르짖는 것(시 40:1)에서 위대한 신앙의 모습으로 다윗이 그려지고 있습
니다. 기가막힌 웅덩이란 미끄러져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웅덩이입니
다. 기
어 나오려고 하면 또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고 계속 미끄러져서 도
저히 기어 나올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그 수렁에서 반석 위로 구원
을 받는다고 합니다.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
여기에서 반석이 무엇입니까? 이어 6절에서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
니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에서는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말씀
합니다. 제사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정성이지만 정작 하나님은 우
리에게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말미
암아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마음 즉 절망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
다. 그리고 7-8절에 등장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여기에서 ‘나’는 다윗이
아닙니다. 그 분은 바로 메시아입니다. 이 분이 바로 반석입니다. 이것은 히
브리서가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열심으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주”로 말미암아 된 승리를
얻
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향한 열심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아니라
주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
그와 같은 경우를 누가복음 22장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가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은 아시면서도 그냥 놔두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가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
드로의 통곡이 우리의 통곡입니다. 이 실패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그 전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한 사실이 있습
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룰 힘
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이 나오게 됩니다. “이 모든 사람
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마치 “다 버릴지라도”의 댓구
와 같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이런 사실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어릴 때부터 싹이 파란 영재
들을 쓰실 것 같은데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김치를 담글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이죠? 배추를 절구는 것입니다. 푹, 절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그렇게 하십니다. 통곡하고 돌아와야만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으로 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말
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이 고백이 진실이지만 이것을 이룰 힘은 나에게 없
습니다” 하는 무언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처음에 베드로의 고백은 그것이 곧 믿음이요,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
만 예수님은 세 번 부인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비로
소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하게 만든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게서 “자기의 의(義)”를 빼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과정인 것입니다.
“내가 하겠습니다”는 것으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예
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내가!”가 아니라
“주님이”일 때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빼버리고 주만 붙들도록 만드심으로 믿음의 성장, 성
숙
, 승리의 발전을 이루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키우는 것으
로 승리,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통곡의 과정을 실패로, 절망으
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지만 결코 내 주머니에는 절대 허락을
안 하십니다. 주 안에 들어오라는 것이지 내 주머니에 채워주셔서 큰소리치
게 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성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전부입니다”라고 말
하는 이것이 믿음의 전부입니다. 이 근거 없이 내 자랑이 믿음이라고 하면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최고 경지는 겸손해지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저 자신이 쓰임 받는 존재가 됨이 영광인줄 아
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을 확인하는 길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입니다. 그 첫 가르침
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함이 조건
이 되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함이라고 하는 바로
그 상태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복의 증세가 심
령의 가난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게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이여 채워주소서”라고 한다면 큰 오
산입니다. 나에게 채우면 얼마나 채우겠습니까? 나에게는 힘이 없으니 오로
지 하나님만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겸손한 체 하여 하나님이 힘주시
면 능력을 얻어 자기 자랑하는 식이 아닙니다. 내가 충만하여 지는 것이 아
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바울 사도도 쓰시려고 한다면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최고의 재목감이었습
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데반을 쳐죽이고서야 등장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바
울이 평생 죄인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
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온갖
고난 배고픔, 갇힘, 매맞음 등등.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육
체의 가시”도 있었습니다(고후 12:1 이하).
하나님만 믿는 것이 바로 믿음
최고로 쓰임받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장 큰
은혜를 주셨을 때, 가장 큰 능력을 행할 때에도 나는 여전히 막대기 같은 허
접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를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를 붙잡아
힘이, 능력이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의
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같이 내 안에는 재고가 없습니다. 후- 하고 불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우리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싸움을 싸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자기 의(義)
를 철저하게 제거시켜 나가는 것이 곧 신앙의 성숙이며 이것이 성화의 길이
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
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