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의 크리스마스
이강숙 집사(순천제일교회)
어느새 2004년도 12월이 되었다. 예년에 비해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올해는
경제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은지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도 나질 않는다. 대형 추
리가 세워지고 자선냄비가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는 시기이지만 올 크리스
마스의 기분은 썩 내키지 않는 눈치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자선냄비의 모금
액은 더 많아진다던데…
올해도 추리를 만들면서 몇 가지 장식품을 사려고 시장엘 나가 보았다. 장식
품마저도 예년처럼 홍수를 이루지 않고 작년의 재고를 쓴다는 상인의 말이 왠
지 씁쓰름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내 머리 속에 스치는 영상은 변함 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2학년으로 기억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추리도 만
들고 문학의 밤도 하고 연극도하고 찬양을 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고 축하
의 분위기로 천장에 색종이 이음줄을 만들고 반짝이 촛대도 만들고 십자가도
만들어 추리 맨 위
에 세워놓기도 하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행사
의 일정을 담은 주보를 만드는 일이었다. 물론 성가를 부르며 집집마다 다니
며 많은 선물과 음식을 받아내는 일도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은 흥미진진한 재
밌거리였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폼을 만들어서 복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등사기로 밀어야
하는 아주 수동적인 작업을 해야 만했다. 초로 만든 얇은 초지에 철필로 글씨
를 일일이 써서 그것을 등사기에 붙이고 잉크를 적당히 묻힌 로울러로 밀어내
야 하는 작업인데 필요한 장 수 만큼 찍어 내야하고 손으로 잉크를 묻혀서 하
기 때문에 어느 쪽은 옅은 검정색이고 어느 쪽은 짙은 검정색 활자가 보이기
도 했다. 등사기를 밀다보면 온통 검정 잉크로 얼굴과 손에 뒤범벅이 되기 일
쑤였고 오자가 나와도 그땐 수정이 불가능해서 일일이 손으로 다시 고쳐 쓰
곤 했다.
한번 등사기로 찍어 낸 주보는 스케줄이 바뀌거나 찬송가 하나가 바뀌어도 다
시 초지에 글씨를 써서 찍어내야 하므로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도 특별 찬양하는 사람이 바뀌어서 다시 찍어내는 작업을 했었다. 행사는
내일로 다가왔는데 주보가
준비가 되질 않아 밤늦게까지 등사를 하고 있었
다.
이것을 보시던 사모님께서 한참 먹을 나이의 우리들에게 고구마를 쪄 내오셨
다. 얼마나 배들이 고팠는지 온통 잉크로 시커멓게 범벅이 된 손으로 그 고구
마를 먹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사모님께 드시라는 말씀조차 하지 않은 채 각
자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는 동안에 사모님께서 대신 등사기를 미시다가 사모님 얼굴에 시커먼 잉
크가 묻었고 묻은 얼굴을 인지하시지 못한 사모님은 계속 근엄한 얼굴로 등사
기를 밀어내시며 우리들에게 얼른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당부를 하셨다.
한창시절 젓가락이 굴러도 웃던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대며 웃었고
영문을 모르시는 사모님께서는 왜 그리 헤프냐고 나무라셨다. 그러다가 마침
목사님께서 그곳으로 들어오시다가 사모님의 모습을 보시며 박장대소를 하시
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도 모두 한바탕 웃고 나서야 하던 일을 마쳤던 생각
이 난다.
그 사모님께서 구워 내오신 군고구마의 맛이란 그때만큼 달고 맛있었을까? 이
젠 연로하시어 바깥출입도 잘 못하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한번 찾아뵙지
못
하는 것이 애석하기만 하다. 그때는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
각이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게 보셨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벽예배를 다닌다고 일찍 일어나 어두운 길을 가노라면 가슴이 쿵쾅거리기
도 했지만 가슴에 성경책을 꽉 끌어안고 교회를 향하던 그 발걸음이 얼마나
빨랐던지….
전봇대에도 콜타르를 묻혀 세우던 그 시절…
아마 나무 전봇대여서 썩지 말라고 시커멓게 칠을 해서 세웠던 전봇대가 그리
운 지금, 검은 빛깔의 인쇄물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그 시절은 지금도 아련
히 떠올라 크리스마스만 되면 학창시절의 추억과 주님을 향한 열렬했던 그 마
음은 아직도 설레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