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는 칼빈주의적 개혁교회의 중요한 유산들을 전수받았는가? 이차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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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칼빈주의적 개혁교회의 중요한 유산들을 전수받았는가?

이차식 목사/ 덕일교회

종교개혁 후에 모든 교회들은 각자의 신조와 신앙고백의 기반 위에 그 교회
의 정체성을 세워나갔다. 선교지 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어떤 신학적 교리
적 기반 위에 교회를 세웠는지에 따라 미래의 교회의 모습과 색깔이 결정지어
지는 것이다. 선교지 교회에서 한번 자리 잡은 신앙의 표준 및 교회정치의 형
태는 쉽게 바뀌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신앙의 현실을 이해하려
면 교회의 역사 초기부터 선교사들이 어떤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는데 수종들
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선교 초기부터 한국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
로 채용하지 않았다.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교리적으로 체
계화한 웨스트민스터의 교리를 근거로 하여 정체성을 나타내었다. 한국장로교
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1907년 독노회 조직 당시 12신조 서언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 문답은 성경
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905년 인도 자유 장로교회가 채용한 12신조를 한국장로교회
의 신조로 채택하였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을 밝히 해
석한 책 이를테면 일반적인 주석책 정도로 평가하며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의 
표준으로 삼지도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 것은 1963년에 합동측이 정식 채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제48회 총회록에 의하면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
요서를 우리의 신앙표준서로 수납하도록 하여 달라는 것은 표준서로 수납함
이 좋은 줄 아오며…(총회록, 제48회, 1963, p.29)라는 보고를 정치부장 노
진현씨로부터 받고 가결하였다. 여기에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처음으
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의 표준으로 채택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따라 헌법 중 정치의 내용이 수정되는 것
은 1968년 제53회 총
회에서였다. “헌법수정위원장 김윤찬씨의 계속 보고는 별지와 같이(부록 
(15)) 받되…가결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 별지 내용을 보면 “장로 집
사, 임직 순서시 서약(13-3-2), 강도사 인허시 서약(14-5-2) 목사 임직시 서
약(15-10-1-2) 내용 중의 [(신경과)요리문답]이라고 되어 있던 내용을 [(신조
와)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을 신종하는 것으로 고쳐 서약하
게 한다”는 정도였다. 
더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합동측 총회가 196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도 
게요, 대 요리문답, 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부, 1969, 12, 10 편집인 박형룡] 
이라 하여 출판한 것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역문은 내용을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신도 게요에 따라 최초 원본대로 취하고 각주는 주로 미국 
남 장로교회 신도 게요서를 취함, 단 최초원본보다 상이한 몇 구절이 있으니 
국가직위정자와 결혼에 관한 조문들에서다( 같은 글, p. 85). 
이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문답 역문은 내용을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대 요리문
답에 따른 것임.(같은 글 p. 184)”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은 합동
측 교회가 
선교사들에 의해 주어진 미국판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것도 선교1세기가 되어가고 있을 즈음에 뒤 늦게야 자기의 신앙고백으
로 삼은 사실이다. 통합측은 1967년, 고신은 1969년, 기장은 개혁신앙의 전통
에서 벗어난 루터교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포함해서 나름대로 수정하
여 1972년에 채택을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용하지도 않았으며 후에 웨스
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한다고는 했으나 1647년의 것
이 아니라 미국교회에 의해 1729년, 혹은 어떤 부분은 1887년, 1903년까지 수
정되고 중보된 미국판인 것이다. 신앙고백과 교회의 관계를 보는 점에 있어
서 구라파의 장로교회와 신대륙미주에 이식된 교회는 많은 입장의 차이가 있
어왔다. 지금까지도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전통에 있는 구미의 개혁교회는 입
교시에 신앙고백들 속에 요약되어 있는 말씀을 진실히 믿는 것에 대한 서약
을 함으로 입교인이 되는 것이다.

2. 한국장로교회는 어떤 이유로 개혁교회의 중요한 내용들을 전수받지 못했는
가.
지난 번 글에서 한국의 초기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전통적 개혁
주의 신학을 품
은 분들이라기보다는 알미니안 신학에 대하여 매우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면
서 복음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가진 분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저들은 한국
교회에 대하여 칼빈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해야 할 그 중요성이나 역사적 가치
를 느끼지 못했던지 혹은 당시의 선교일치만을 위해서 중요한 신학적인 내용
들을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선교지교회의 역사적 기반을 놓은 때에 장로교회의 교리적 기반인 웨
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확고히 하는 대신 인도 자유장로교회
가 채용한 12신조를 임시 채용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12신조를 채용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곽안련은 “우리 신경은 만국 장로회 
신경 중에서 최호한 거시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보다 
나흐니 우리 신경은 간단하고 명백하여 알기가 용이한 것이라… 조선신경이 
간단하나 유치한 거시 아니요, 완전한 신경이며 이보다 우승한 신경이 세상
에 없고, 고대 신경 중에 우리 신경보다 나은 거시 없고, 고대 신경 중에 우
리 신경보다 부족한 거시 만흐며 웨스트민스터 신경이라도 이 신경보다 우

하기 어려우니라…이 신경은 현시대 형편에도 적당하고 성경에도 적합하
니… 또 장로감리 양 교회 연합 문제를 인하여 회집하였을 시에 연로한 감리
교파 선교사의 말이 두 교회가 연합하게 되면 우리 감리파가 웨스트민스터신
경은 채용하기가 극난하나, 이 인도국에서 출래한 신경을 채용하기가 어렵지 
아니하다 하였으니 감리파의 타 교역자는 여하게 생각할 넌지 알지 못하거니
와 가히 알만한 일이라“ 하였다(곽안련, “조선야소교 장로회 신경론” 
p.76). 
여기에 보면 유명한 일곱 신경이라는 것은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
스신경, 스위스신경, 돌트신경,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39개조 신경을 말한
다. 곽안련 선교사가 이러한 신조보다 12신조를 그토록 과찬한 것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곽안련을 비롯한 후대의 교회사가들이 12신조를 채
택한 동기가 선교지 교회에 대한 배려인 것처럼 피력하고 있다는 점도 납득
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감리파가 웨슷민스터신경을 채용하기가 극난하다”
는 것을 볼 때 무조건 선택과 유기, 이와 관련된 제한 속죄 등의 교리가 분
명하게 기술된 내용을 고집하면 알
미니안 파와의 연합일치를 가지는데 지장
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 한국 장로교회는 정체성 있는 개혁교회의 모습을 확립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초기 선교사들은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인 중요한 유산들을 
신앙의 표준으로 전수해 주지 못했다고 할 수가 있다. 초기선교사들이 장로교
회의 기반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을 교회역사시발부터 공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리교와의 일치운동
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임으로 한국장로교회는 정체성 있는 개혁교회의 모습
을 확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선교지의 문화적 상황과 자율성에 대한 배려의 차원도 있었을 수 있으
나 그 배후에 가려진 이유는 개혁주의의 참된 교리와 신학보다는 초교파적 일
치운동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윤선은 “평양장로회 신학교가 개혁
주의 신학을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 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
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 못하였

다”(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영음사, 2002, PP.55,56)라고 하였다. 이러
한 선교사들의 사상은 그들의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후에 한국교회의 교회
관이나 교회 정치형태에 있어서 상당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 정치의 터를 놓다시피 한 곽안련의 글을 보면 “장로교나 감리교에
선 상회가 있으며“라고 한다(목회학, 대한기독교서회, 곽안련, 1925년 p. 
290).
그가 J. A. Hodge 글을(WHAT IS PRESBYTERIAN LAW?) 번역할 때는 상당부분 
미 연합장로교회의 것을 채용해서 더 교권 주의적으로 편역을 함으로 한국장
로교회의 교회정치헌법에 회중교회 혹은 감독주의 교회에서나 있을 듯한 내용
들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선교사들이 칼빈주의적 개혁교회의 중요한 유산들을 제대로 전
수해주지 못함으로 인하여 한국장로교회는 바른 교직관이나 교회관은 물론, 
교회정치면에 있어서 개혁신앙의 독특한 내용을 가지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
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
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질적인 교회 분열과 같은 많은 문제점을 
안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