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지성교회 문종철
시작하는 말 : 확고해진 참된 개혁 교회상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할 때, ‘개혁된 교회
(Reformed Church)’의 첫 지점은 어디인가? 역사적으로 교회가 개혁되었던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개혁된 내용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
다. ‘개혁신학’을 말하거나 ‘개혁교회’를 말할 때 이 질문은 늘 있어왔
고, 그 물음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답변은 “16,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
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과 답변과 주장의 근거는 중세 로마 카톨릭의 부패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거짓된 종교적 열심과 거짓된 신학, 그리고 성경의 증거로
부터 심각하게 멀어진 거짓된 교회의 모습들로부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
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성경의 증거를 따라 바르게 잘 드러내었던 때라
고 믿기 때문이다.
16, 17세기는 칼빈을 비롯
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교회 역사상 두
드러지게 있었던 때임이 틀림없다. 또한 신조와 신앙고백들로 인하여 역사적
으로 나타났던 수많은 이단적 내용에 대하여 성경의 입장으로 거짓을 물리치
고 거짓된 도전에 당시의 교회가 충분하게 대답하였었다. 그로 인해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 성도가 마땅히 하여야 할 참된 신앙 고백의 내용
이 무엇인지를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16, 17세기를 일컬어 교회가 역사적으
로 ‘개혁된’ 때였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귀중한 내용들이 있다 하여도 교회가 개혁되었던 한 때는 엄
밀한 의미에서 16, 17세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16, 17세기의 교회 역시
역사 속의 모든 교회처럼 개혁될 내용을 주님 안에서 겸손하게 지니고 있었
기 때문이다. 교회역사에서 ‘개혁’ 이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개혁주
의’ 라고 표현될 수 없는데 성경 계시에 입각하여 볼 때 ‘개혁(Reform)’ 이
란 하나의 ‘주의(ism)’, 즉 개혁주의(Reformism)’로 표현하거나 설명될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개혁된 교회
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모토인데, 이 표현 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
겨 있다. 먼저는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시점에 특별하게 ‘개혁된’ 때가 있었
다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그 때와 그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여 교회는 장
차 궁극적인 한 때가 이르기 전까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현재 진
행’ 적인 요구 앞에 스스로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 즉, ‘거룩한 자’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개혁’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무가치하다. 교회가 거룩함을 입었다는 까닭도 교회 자체의 능력에 있
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거룩케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31:31-34의 내용과 마태복음 5-7장, 마태복음 23장, 히브리
서 7-10장까지의 내용은 개혁의 주체가 누구인지, 개혁의 때가 언제인지, 무
엇이 개혁의 내용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1. 개혁의 때에 대한 성경적 증거
예레미야 31:31-34에는 역사적으로 개혁되는 때와 개혁의 주체와 개혁의 대
상이 모두 언급되어 있다. “보라 날이 이를 때에 이스
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 때
는 바로 언약의 사자이신 주님께서 오실 때를 말하며, 그 때에 교회(이스라엘
과 유다 집)에는 새로운 언약, 즉 개혁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언약
을 세우시는 즉 개혁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יꚝꙝꗏ).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은 첫 언약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편처
럼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하나님의 “언약을 파하였다(32절)”라고
함으로써 교회가 지니고 있는 연약성과 한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 주께서 교회에 세우실 언약은 주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 마
음에 기록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주께서 그들의 하나
님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건이 바로 역사적으로 교회가 개혁되는 때이
다(33절).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서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
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주님을 안다
라고 하시며, 주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다
시는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신다(34절). 이 내용이 바로 교회에게 역사적으로 한 번 있는 ‘개
혁된’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예언
의 말씀을 친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 그 운명을 두고 있
다.
“개혁된 교회”는 이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전체 역사
속에 있는 신실한 교회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이미’ 개혁되었
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주의 나라가 다시 온전하게 임
하실 때까지 늘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16, 17세기의 교회와 그들의 신앙
고백의 의미는 교회가 늘 주께서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신 개혁된 내용 안에
서 개혁되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5-7장과 23장의 내용을 통해서도 ‘개혁의 주체’와 ‘개혁의 대
상’과 ‘개혁의 내용’ – 역사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대한 내용 – 이 잘
설명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됨, 애통하는 자의 복됨, 온유한 자의
복됨,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됨,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됨, 마음이 청결
한 자의 복됨, 화평케 하는 자의 복됨,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의 복됨을
말씀하심으로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 주께서 친히 선포하셨다(마 5:3-10).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라는 말씀과 “이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
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는 말씀은 주님 자신이 개혁의 주체로서
의 권세를 갖고 계신 유일한 분이심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교회가 마땅히 선포해야 할 참된 말씀의 선포를 이미 선포하
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말씀을 잘 드러내
는 일에 힘쓸 의무만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교회가 자기 스스로의 지혜와 권
세로 참된 복음의 선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이 하신 참된 말씀의 선포 보다 ‘새로운 의미’의 선포는 역사 속에서
어느 때에도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된 복음의 선포는, 참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오신 주님 자신이시
며, 참된 제물이시며, 참된 제사장이신 주께서 단번에 이루신 역사적 개혁의
사실 속에 ‘개혁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두신 것이
니라(히 9:10)” 라는 말씀은 역사적으로 참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
해준다. 주께서 친히 가르치신 말씀의 선포와, 죄와 상관없이 주께서 이루신
단 번의 구속 사역을 인하여 역사상의 모든 교회는 이미 구원을 얻었고, 교회
는 이제 두 번째 나타나실 주의 나라를 소망하며 계속 개혁되어가고 있는 것
이다(히 9:28).
2. 개혁의 주체, 대상, 내용은 무엇인가?
‘개혁’과 ‘개혁교회’ 라는 말을 사용할 때 분명하게 이해 해야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개혁의 주체’에 대한 이해와 ‘개혁의 대상’에 대한 이
해 그리고 ‘개혁된 내용’에 대한 이해이다. 교회가 개혁을 말할 때, ‘개
혁’ 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함의되어 있는 대로 그 출발은 언제나 ‘전적 타
락(Total Depravity)’을 인정하는데 있다. 개인이든 교회든 분명히 알 아야
할 것은 사람은 언제든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 혹은 교회가 서 있는 위치란 본질상 늘 ‘개혁의 대상’으로 서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개혁의 주체가 누구인
지에 대한 질문은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개혁의 주체는 ‘성 삼위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러므로 삼위 하나님 외에 어떤 인물을 향하여 엄밀한 의미에서 ‘개혁자’라
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와 교회는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전 피조물은 누구나, 모두가 ‘개혁의 대
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고, 그로 인
한 전 피조물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앎이 있을 때, 우리는 ‘개혁’이라
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데, 그 의미를 성경은 ‘새 생명’ 또는 ‘구원’이라는 말로 증거하고 있
다. 그러므로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를 말할 때 ‘개혁된’의 의
미는 역사 속에서 특정한 때에 특별하게 ‘한 번’ 있었던 사건과 내용을 의
미하는데, 그 특별한 때가 언제였는가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 내용을 바르게
알 때, 우리는 ‘개혁된(Reformed)’ 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주적 보편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개혁된
것은 율법과 계시의 내용을 완성
하시며, 자기 백성 안에 친히 임마누엘 하시고,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시어, 교
회를 한 몸으로 연결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교회는 역사적으
로 개혁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개혁된 교회의 시작’인 것이
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이 때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사건 속에서 교회
됨의 의미를 찾고 있으며, 신약의 모든 교회들 역시 이 사실에 근거하여 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3. 교회 역사 속에서 16, 17세기 교회의 자리
16, 17세기에 일어났던 신앙고백의 내용들과 칼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2000년 전 혼돈하고 공허했던 부패상을 뚫고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계시를 완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주께서는 당시 심히 부패하였던 실상들을 향하여 자신에게만 있는 지혜와 권
세를 발휘하셨고, 거짓과 우상의 아비인 사단의 세력을 역사적으로 이미 결박
하셨다.
이 사실이 바로 교회 역사에 있어서의 ‘개혁된’이란 용어의 의미이다. 그
런데 그 이후의 역사와 중세에 이르러 교
회 아닌 거짓 교회가 마치 참된 교회
인양 그 부패한 힘을 극도로 발휘하는 때가 있었고, 주께서는 그것을 이미 이
루신 성경의 증거를 따라서 그 시대를 심판하셨고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셨던
것이다. 16, 17세기의 소위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맥락과 의미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교회는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상태에 있으
므로 교회는 개혁된 내용 앞에서 항상 개혁되어야 할 개혁의 대상으로 존재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본질적이며 엄밀한 의미로서의 ‘개혁’
을 알고 있더라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참된 신자와 교회라면, 16, 17
세기의 주께서 이루신 신학과 신앙고백의 내용들을 마땅히 배우고 알아야 한
다는 점이다. 참된 신자요 교회는 그 내용을 무시하거나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내용을 배우지도 않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 신앙고백들을
형식적으로만 인정하며,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갖고 교회라
여기는 것은 철저한 자기 기만이다. 주께서 이루시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 신앙과 신학의 내용은 사실 16, 17세기
의 교회의 신앙고백들이 진지하고
바르게 증시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이 사실들을
부지런히 찾고 알아가고 배우는 것은 2000년 전 주께서 친히 역사 속에서 이
루신 ‘개혁된 교회’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는 말 : 항상 개혁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교회
교회가 ‘개혁’을 말할 때는 카멜레온의 변신처럼 시대적 유행을 따라 그
시대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하거나, 나름대로의 새로운 것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회귀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주께서 이미 역사
속에서 특별하고 온전하게 이루어 놓으시고 가르치셨던 그 사건과 사실과 내
용 안으로(성경계시 안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칼빈의 말처럼 교
회는 늘 새로운 것이 교회를 미혹하지 않도록 성경의 내용에 확고히 서는 일
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현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 문답을 신앙
고백하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신앙고백, 돌트신조 등을 신앙고백으
로 삼는 것은, 적어도 성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신 역사적으로 ‘개혁된 교
회’ 안에
속하려는 합당한 자세이며, 온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신비한 연
합을 이루는 ‘보편의 교회’ 속에 참여하려는 ‘신앙고백’을 의미한다. 교
회가 보편의 교회로서의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일은 무엇보다도 신앙고
백을 함께 하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신앙고백의 원리를 교회가 16, 17세기의 신앙고백의
내용들 안에서 찾으려 하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16, 17세기의 신
앙고백들의 귀중한 내용들은 ‘개혁된 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할 것이 무
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16, 17세기의 유산들이 성경 계시 전체의 내용
을 핵심적으로 체계적으로 잘 증거 한 훌륭한 내용이기에 교회는 마땅히 그
내용을 존중하고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성경의 권위에 언제든지 복종하는 차원에서 있어야 하고,
그 가치 또한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16, 17세기
의 신앙고백의 내용은 주께서 이미 이루시고 가르치신 성경의 참된 내용에 충
실하고자 했던 것이므로 오늘날 교회는 그 신앙고백과 내용을 지속적으로 배
우고 검증하고 때로는 보충하여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개혁 신앙
을 겸손하게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