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적인 이단 등의 출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 부흥과 복음전파를
위하여 부흥운동이 계속되게 하셨다.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 박용묵 목
사 등 훌륭한 부흥사들의 활약이 침체속의 한국 교회를 일으켰다. 1960년대
각 교단의 분파와 분열의 아픔이 있었지만 1965년 초교파적으로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대중 전도집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이후 계속
된 부흥전도집회가 지방별로 이루어지면서 당시 4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당시 부흥회는 월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하였다. 특히 성령운동으로 세
워진 오순절계통의 순복음교회는 당시 부흥운동으로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60년대 말의 부흥운동은 초교파적 운동이었다. 이웃 교회가 부흥회를 한다면
내 교회 부흥회 하는 듯 기뻐하며 참석하고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성도간에
교제가 활발하였다. 당시 선교운동이 공단과 노동자들에게 파급되어 산업선교
회가 활발히 활동되기도 하였
다.교회가 새벽기도의 열심 때문에 당시 새마을
운동 노래 가사까지 인용되게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국가는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고, 유신체제 아래와 그리고 10.26사건 등 어려운 시련속에서
도 교회는 계속 부흥운동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여 700만의 기독교인 숫
자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초교파 부흥협회가 조직되면서 활발히 부흥회가 전
국적으로 개최되었고 1973년 빌리그래이엄(Billy Graham)의 3차 집회가 여의
도에서 5일동안 회집되면서 수만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974년 Explo74 대회
로 큰 전도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의 부흥발전은 70년대 말에 이룩되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부정치로 5.18 광주민주화운
동등 유혈사태와 6.29선언등 정치적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도 교회는 계속
적인 부흥회와 전도열기가 지속되어 1990년 통계에 의하면 3만5897개의 교회
에 6만4688명의 교역자, 1212만 1837명의 교인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부흥회보다 질적성장을 위한 성경공부라는 바이블
스터디(Bible study)가 교회마다 바람을 타듯 일어났다. 풍요한 생활문화 속
에서 목회자들도 교회의 내실을 다진다는 생각에 교회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
해 지식주의 학문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는 기도
와 부흥운동이 식어지면서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지금까지 뒤돌아보면서 우리
는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부흥운동으로 발전하고 성장되었음을 긍
정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교회 성장은 목회자 자신
의 긍정적인 성령 역사를 의지하는 활력있는 비젼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
야 한다. 건전한 은혜운동이 1년에 2-3차례 또는 3-4차례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은 개혁적 사명감이 높다(?)고 우리들이 자평한다(밖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지만). 우리들만이 높은 신학수준을 갖고, 바르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다른 교단은 부패하고 잘못된 것처럼 인식하는 교만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므로 부흥회나 건전한 은혜운동을 수준이하의 운동으로 보고,
높은 학문(?)과 높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부흥운동을 제한시키거나 무시하
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이렇게 된 여러 원인이 있다면 부흥사
들의 매너와 사역 그리고 여러 가지 발생된
도덕적 타락등 부흥사들의 어두
운 면들이 교회에 상처를 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도 부
흥사들의 많은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싶다(지금은 부흥사들의 교육이 자주 있
음). 그러나, 부흥회가 교회의 활력과 성장에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큰 영향
을 끼치고 있다. 부흥운동은 목회자에게 도전을 주고 성도들에게 힘을 주며,
교회 부흥과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해준다는 측면에서 동의해 주기 바란다.
진정한 한국 교회의 개혁도 성령의 능력과 부흥운동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각 교회마다 기도운동과 은혜운동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이 교회
를 이끌도록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건전한 은혜운동이 교회의 영적 질
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됨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