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성
< 천한필 목사, 예다임교회 >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해서 내게 주어진 잔 피할 수 없어”
사람은 누구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며 대접받고자 한다. 에덴동산이후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결핍을 어떻게든 충족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시지 않은 한 인간은 그 사랑의 결핍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런데도 기적 같은 사랑의 신비를 맛본 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에게 먼저 ‘사랑의 찜’을 당한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 성도들이다.
베드로는 우리 신자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벧전 2:9절). 더 이상 신자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다. 이와 관련해 히브리서 11장 38절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신자들을 가리켜 무쇠로 만든 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서 소개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가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신자의 반응이다.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철인’, ‘영웅’, ‘성자’를 추구할 이유가 없다. 세상 속의 ‘성공 비법’은 더더욱 의미 없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백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앙적 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 영웅적인 신앙을 뽐낼 수 있는 비법이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는 국어 실력만 있어도 된다. 곧 앞선 11절과 12절을 먼저 읽고, 다시 13절을 보면 쉽게 해석할 수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곧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앞세우려는 것인가? 세상이 부러워서, 세상의 그 어떠한 매력적인 것을 쟁취하고 싶어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다’는 구호를 외치고 싶은 것인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데 있어서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도 불가능이 없으시다. 나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세상을 공포와 부러움과 가치의 대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아멘’할 수 있겠는가? 만일 마음에서부터 동의가 안 된다면, 아마도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은밀한 자신의 탐욕을 위해 남용했던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는 누구도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신앙의 년 수, 목회 경력까지도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는 무가치하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과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은 결코 남용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나 자신을 숨길 수 없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내게 주어진 잔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나 자신이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한다. 쓸데없이 소리치며 힘 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자.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절).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래서 나의 현실에 요행과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나의 일상과 현실을 더욱 묵묵히 직면해야 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전능성이 배부름과 풍부가 아니라 배고픔과 궁핍의 상황으로 드러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리며 묵묵히 아멘으로 반응해야 한다. 평생에 걸친 거룩한 몸부림의 연습을 통해서 그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