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방동섭 목사, Holy Hill Community Church, LA >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을 선전하고 나타내려는 사람들 많아”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세례 요한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막 1:3). 이 말은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만일 누군가 “당신은 평생 다른 사람의 길을 예비하면서 살아라. 당신은 평생 엑스트라만 하면서 살아라”고 말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누구든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탤런트 전현주씨는 평생소원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한번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분명한 것은 엑스트라가 있어야 주인공도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는 세례 요한이 사라지고 있다. 모두가 스타가 되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어떤 교회에서 선전하는 부흥회 포스터나 무슨 세미나 전단을 보게 되면, 그 강사가 예수님을 전하겠다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선전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왔다“고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으로 오는 것은 그 당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올 때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 수십 리를 와야하고 돌아가 때는 험준한 산을 올라야 한다.
세례 요한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 명성이 예루살렘 주류 사회와 온 유대를 뒤흔들고 벌떼 같은 인파를 모으고 있었는가? 그 당시에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 있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의 전하는 소리를 듣기 원했으며, 그에게 세례 받기를 원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세례 요한의 인기는 ‘짱’이었다.
아미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역사의 변두리 인물이 아니라 주인공처럼 보았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그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기 절정의 자리에서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은 그 당시 세례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쇼킹한 뉴스였을 것이다.
첫째, “이 엄청난 인파가 따르는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 둘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세례 요한이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면 그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분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묵상하는 신자라면 너무 통쾌하고 너무 감격스러워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이렇게 통쾌하고 멋지게 높이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금만 일이 잘 되도 우리가 나타나고, 조금만 높아져도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우리가 아닌가? 중국 고전에 “지선후(知先後)면 축근도(側近道)라“고 하였다.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에 오는지를 알면, 그 사람은 도에 가까이 이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즈음 신자들 가운데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무리 현대가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 할지라도 크리스천이 무엇이 앞서고 뒤에 와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은 무엇이 앞에 와야 하고, 무엇이 뒤에 있어야 하는지 철저히 인식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마가는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면서 초두에 세례 요한을 등장시켰다. 왜 그했을까? 마가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마가는 복음서 초두에 세례 요한을 등장시켜 복음의 무서운 시작을 알린다. 이스라엘 역사에 세례 요한처럼 엄청난 백성들이 지지하고 따르던 선지자는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마 11:11)고 하셨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그렇게 크고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온 유대와 이스라엘을 흥분시키고, 그 엄청난 인파를 모았던 세례 요한이 “자신은 허리를 굽혀 주님의 신들메를 푸는 자격도 안 된다“고 했을 때, 이 고백은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마가는 이렇게 극적이고 멋진 반전으로 주님의 복음의 세계를 시작한다.
마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 분 앞에서는 세례 요한의 그 찬란한 명성과 인기도 그렇게 빛을 잃어버리고,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자랑할 만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영광 앞에서 그리고 그 능력과 권세 앞에서 철저하게 완전하게 압도당하여 주님만 나타나기를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