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에 대한 반박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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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48>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에 대한 반박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외형적 표징만으론 본질 왜곡시킬 수 있어”

78문>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죄 씻음 자
체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표와 확증인 것처럼, 주의 만찬의 떡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의 떡을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하는 것은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적 용어입니다.
79문>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떡을 그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그의 피 혹
은 그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또한 바울 사도도 왜 그
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
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
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
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
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
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
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먹는 것처럼 실제
로 성신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둘째, 그리
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
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중세 로마천주교회는 성찬에 대한 소위 ‘화체설’을 정통성 있는 교리로 발
전시켰습니다. 떡과 포도주라는 재료가 성찬에 사용될 때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하여 새로운 본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성찬
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교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교회가 
이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유익을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화체설 주장하는 로마 천주교회

첫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찬에 대하여 좀 더 납득할만한 이성적 설
명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
실입니다. 어떤 물질의 원재료와 그것이 
가지는 본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이미 오랫동안 받
아들여지고 있던 철학적 사유였습니다. 그러므로 떡이라는 재료에 새로운 본
질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성찬을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지성에 부합하는 것이
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을 가리켜 그의 몸이라 하신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화체설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적 타당성을 가지는 설명을 할 수 있
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발전하면 지성 사회에 복음을 변증하는 것도 
그만큼 쉬워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화체설은 교회의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교회는 한 지역에 모여 있지 않고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황
을 중심으로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교황을 정점으로 다양한 사
회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모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황에
게 충성하는 성직자들에게 일반 성도들이 부여
하는 권위가 필수적이었습니다. 
화체설에 따르면, 성찬을 위한 성직자의 기도가 있을 때 떡과 포도주의 본질
이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수 
있도록 떡의 본질을 바꾸는 성직자의 기도는 엄숙한 가운데 이루어졌을 것입
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더욱 더 경건했을 것입니다. 이
와 함께 성직자의 권위 또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
찬의 엄숙함과 집례자의 중요성이 한 층 강조되면서 교회는 보다 견고한 조
직체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중세 로마교회는 화체설을 통해 성찬을 보다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었고, 교회의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체설은 이와 
같은 유익들을 교회에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면상의 유익이 
실상은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표와 보증의 역할을 하는 성찬의 진
정한 의미가 퇴색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이 그리스도인
의 삶에 미치는 실재적 효력이 제대도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성찬이 말하
는 그리스도의 구속사
역의 확실성도 오히려 가려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유사한 경우가 떠오릅니다. 마치 벽돌이라는 일반적 건축 재료가 예
배당 구조물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때, 그것의 본질이 변한다고 생각하
는 경우입니다. 이를 통해서 보다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을 지을 수 있고, 성
도들은 보다 경건한 모양으로 이곳에 모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오히려 퇴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개혁가들은 성찬에 대한 로마천주교회의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사람의 이성
으로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씀의 권위 아래서 믿음으로 받아들이
는 것, 주님이 허락하신 성례를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순
수한 의도를 살리는 것, 이것이 개혁가들의 의지였습니다. 

개혁가들은 화체설 주장에 반박해

성찬에 대한 보편 타당한 이해, 그것의 엄숙함, 견실한 교회 체제 이러한 것
들 뒤로 성찬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지는 경우가 오늘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
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