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5>
기독교는 사랑할 수 없는 종교?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요약하여 그 율법의 요구를 가르쳐 주
십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5문> 당신은 그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향해 입을 모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이 말에 이의를 제
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주위
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멀
리는 기아와 재난 속에 허덕이고 있는 다른 민족들
에게까지 힘써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교회는 세상으
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문
과 5문을 보면서 우리교회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습니
다. 우리는 과연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랑에 대한 진지한 질문 필요해
마태복음 19장에는 예수님을 찾아 온 한 청년에 관한 기사가 나타납니다. 예
수님께서 계명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그 청년은 스스로 그것들을 다 지킨다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를 도우라는 예
수님의 가르침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율법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 청년처럼 율법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
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외형적 실천에는 열심인 채 말입니다.
이러한 유의 신앙생활을 하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질문했습니다(마 22:35-36).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하나님
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지니는 진정한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
더라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공허한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지킬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의로
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천상의 사랑이 스며있는 율법의 의미
를 올바로 알 때, 율법을 지키려 노력할수록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이 점점 분
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놓친 채 실천하는 율법은 사람을 교
만하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율법의 의미를 놓친 사랑은 어떠할까요? 율법의 함축으로
서 사랑은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
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문에서 보듯이 그것은 아무도 실천할 수 없는 사랑입니
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핵심을 놓친 사랑은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말하는
사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 밖으로 사랑을 실천하려
할 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간직
해야할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이러한 사랑은 종
교다원주의와 같은 사상의 옷을 입고 교회를 위협하기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실천 치중하다 본질 상실할 수 있어
신약성경 시대에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
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
과 사랑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비참한 본성
이며, 그것을 아는 것은 은혜의 기본이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