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이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_김관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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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

< 김관성 목사, 덕은침례교회 >

 

고난마저도 유용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 믿는 것이 신앙의 정로

 

니체는 “신은 죽었다”를 외쳤습니다. 사실 니체의 이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오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이 선언은 인격적인 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기보다는 초월적인 세계에 근거를 둔 의미와 가치들이 다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다스리고,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세상 외에는 다른 궁극적인 가치들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니체는 살아있는 신의 요구에 근거한 ‘절대적인 도덕질서’를 인정하지 않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상대화 되어버림으로써 개별적 인간들의 끊임없는 싸움과 다툼, 도덕적 가치의 붕괴가 가져오는 타락과 부패가 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가 뛰어난 철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예리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예견과 분석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귀담아 들을 내용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마음의 통일’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개별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분열과 쪼개짐은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모든 사안과 사건에 대한 관점과 시각이 제 각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분쟁과 전쟁이 종식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인류는 통일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이게 옳다고 하고, 저 사람은 저게 옳다’고 하는 아귀다툼이 만연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각 자아들의 개별적 욕망이 서로 싸우고 부딪히는 현장이 사회요 지구촌인 것입니다.

‘초월적인 영역에 계시는 인격적 절대자’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그 마지막 길은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적 질서도 지킬 수 없는 자리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해진 길입니다. 사사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이런 현상들을 분석하면서 인격적인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후에 심리학적인 사고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문가의 시각이라서 더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마틴 부버가 단순하게 던진 말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인 사고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오만방자한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옳고 틀린 것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자기 기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고상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직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벌은 죄로 인해서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올바른 지각능력의 파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웰스가 쓴 ‘거룩하신 하나님’에는 죄로 인해 인간이 중심이 된 삶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속이 텅 비어있고,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인성의 조각들을 취사선택해 이어 맞추고, 약속에 대한 의심이 많고, 성욕 외에 아무런 열정이 없고, 헌신할 능력이 전혀 없고, 실체보다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제약 없는 개인 취향의 매력적인 만병통치약에 따라 움직이고, 개인의 직감만을 따른다.

주님의 몸된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을 닮아버린 교회에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정신들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대접받지 못하는 분위기는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을 자동적으로 삭제시키고 있습니다. 개별적 인간들의 욕망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 실현의 장소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역시 실제적인 하나님의 통치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교회의 구성원들도 개별적인 자신의 주관적 자아의 욕구를 관철시키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김 집사. 기다려. 다음번에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의논해서 표를 몰아줄 테니까 그 때 장로로 취임해.” “장로님, 돈 없다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겁니까? 저 이런 식이면 다른 교회로 가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조롱을 받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했을 때 성도들의 의식에서 경외하고 경배하며 순종해야 할 하나님은 찾아보기 힘들고, 이용하고 사용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의식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의 모든 흔적이 죄 뿐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권리와 누림을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성도들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정서적, 환경적 필요를 충만히 채워달라는 신도들로 교회가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그 분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진 시련과 풍파로 인해 심리적인 결핍과 정서적 고갈을 경험하는 인간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가련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너무 심하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스트레스, 고난, 시련, 아픔, 절망적인 심리적 상태가 없는 세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구주이신 주님을 따르는 그 길에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소망가운데 인내’하는 자리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소망과 기쁨의 원천은 자기중심적인 심리적 안정을 누리는 삶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다 걸어갈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힘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 신자가 가지는 유일한 자신감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설령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 고난을 신자의 인생에 가장 유용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버지의 손안에 있음을 믿고 가는 길,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로이며 자랑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주의 교회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세상을 향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완전하고 변질됨 없는 확신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일체의 사상적 흐름과 세상 정신을 버리겠다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의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외쳐야 합니다. 

이 세상과 교회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