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인생의 가치
< 최에스더 사모 · 남서울평촌교회 >
“이성으로 영원한 천국 이해할 수 없어 믿고 사는 것에 가치 두어야”
예닐곱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천국에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주일하교에서 배웠다.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천국에서 서로 미워하지 않고 슬픈 일도 없이 영원히 사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정말 좋은 것 같았다. 아빠, 엄마가 늙지 않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고, 할머니와 엄마가 서로 미워하지도 싸우지도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매일매일 먹고 싶은 만큼 먹으며 내 친구들과 즐겁게 놀기만 하다니, 공부 같은 건 하지도 않고. 이 얼마나 환상적인 곳인가!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방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이 공상에 빠졌다. 얼마나 좋을지 제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천국에는 내 방도 하나 있겠지? 완벽하게 꾸며진 공주방에서 공주처럼 꾸미고 매일매일 놀고먹는 상상을 하며 실실 웃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영원이라는 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속 따라가 보다가 나는 마침내 공포에 사로잡혔다. 죽지 않고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깨달은 것은 곧 끝이 없다는 것인데, 나는 이 사실에 저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세상에! 끝이 없다니! 기가 막혔다. 아, 아무리 좋아도 끝이 없다는 건 정말 엽기였다. 이 생각을 몇 번이고 골똘히 할 때마다 공포가 몰려와 두 눈을 감고 머리를 가로젓다가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 많은 큰오빠에게 물었다.
천국에서는 정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곳이냐고.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차라리 끝이 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지 영원한 것은 싫다고 했다. 좋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싫으냐고 물어왔다. 그래도 싫다고 했다. 다행히 나의 의문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교회와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이나 의심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교회에서 더 배운 바로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라 이것을 벗어나게 되는 내세, 곧 천국에서의 삶을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3차원에 갇혀있는 우리로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나는 비로소 천국에 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다는 게 뭘까. 이건 고민 안 하기로 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믿음이 갔다. 돌아보면 언제나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벗어난 내가 비로소 알게 되는 그 순간 역시 감격하며 감탄하며 감사를 드릴 또 다른 차원의 세상, 곧 천국에 믿음이 가고 의심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에 갇힌 존재로서 타락한 창조세계에서 죄인의 한계를 지니고서 어떻게 높으신 하나님을 이해하며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까. 우선 나는 철저하게 갇히고자한다. 시간 안에, 공간 속에 모르는 채로, 할 수 없는 채로, 아픈 채로, 병든 채로 그렇게 갇혀 지내려고 한다.
나의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를 인정하고 나는 시간과 공간에 갇힐 수밖에 없어서 미래는 닫혀있고 해답은 가려져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다. 사도 바울도 희미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내게는 거의 안 보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가리어진 것을 보고자하고 볼 수 있다고 하고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했던 그 최초의 욕심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과 기도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보이는 것 너머의 뭔가를 조금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는데 이 개안의 사건이 바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궁극의 것으로 오해하지 않겠다. 이것은 그림자요, 맛보기요, 샘플일 뿐.
따라서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요, 펼쳐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하여 부단히 말씀을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야하는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을 창조세계에서 지나간 세대에게 응답하여주신 하나님의 수많은 음성을 말씀을 통해 차근차근 내 것으로 만들어 가리라.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예배를 통해 한 때는 술집음악이었다는 찬송가 곡조와 시를 통해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지, 과연 나에게 하는 말씀인지 방향조차 보이지 않는 말씀 앞에서 나는 기다리고 기다릴 것이다. 지루하고 막연하다 해도 그것은 알아먹지 못하게 타락한 내 탓인 것을 잊지 않고 내 안에 이미 와 계신 성령 하나님을 귀하게 모시고 그분과의 동행, 그 자체를 감사하며 이 갇힌 세상에서 더욱 철저히 갇히리라.
사실은 아직도 가끔 천국과 영원을 떠올릴 때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 들기는 하다. 어느 날 내가 예감처럼 벼랑 아래로 밀쳐지는 날, 나는 황망함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비명도 없이 벼랑 아래로 내 몸을 맡기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날개를 펴리라.
갇히고 갇혔을 때에 마치 제물과 같이 생명을 버리고 피를 버리고 혈기를 버리고 본능을 버릴 때마다 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 내 어깨에 조용히 자라던 그 날개, 내게 약속된 참된 자유를 보여주던 그 날개를 펴고 마침내 훨훨 날아올라 세상의 꼭대기에서 3차원을 한 번 바라본 후 미련 없이 활강하여 내 주님의 손 위에 순 착륙할 것이다.
천지는 사라지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