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교회와 미디어
박창욱 집사_양의문교회
“예배의 방편과 대상이 전도된 현실 심각해”
흔히들 마샬 맥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을 시대의 예언가
라고 한다. 그가 영문학 교수로 토론토에서 쉰 두 살에 집필한 “미디어의 이
해”(Understandig Media)가 시대를 뛰어넘어 새롭게 조명을 받는 것은 우연
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가 그의 예언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반증
일 것이다. 그의 평가 모두가 옳지 않더라도 말이다.
초미의 관심 끄는 맥루언의 예언
우리는 맥루언의 시대, 즉 그의 ‘예언의 시대’에 살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
하는 인터넷과 전자신문, 고화질 HD 방송의 지상파, 위성, 케이블, IPTV의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통합 방송법을 비롯해 다양한 미디어 관계법의 테두리
에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각과 삶을 저당 잡혀 살고 있다. 편리하게
도 각종 방송 기구와 조직, 그리고 대의민주주의는 우리가 원하
고 택하지도
않은 것까지도 결정해준다.
이 다양한 프로토콜과 사이버스페이스가 우리의 삶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
치게 될지 누구도 선뜻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일찍이 맥루언이 언급
한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된다, 우리는 우리의 도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의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는 전제를 실감할 뿐이다.
우리시대 교회 안에 미디어는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역기능(逆機
能)은 접어둔 체 교회 안에 순기능(順機能)이라 일컬어지는 역할들이 과연
성경적인지 심각하게 되돌아 봐야 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프랜차이즈화 되어 관리되어 가는 마당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우스워 보인다. 그러나 미디어의 사용은 이미 뜨겁
고 간절함이라는 이름으로 찬양과 예배 가운데 깊숙이 침투해 있고 우리의
영혼을 끈임 없이 자극하고 있다. 편리와 실용이라는 명목에 자신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가는 모습들이 ‘불법의 사람’들과 흡사해 보인다.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이끄는 예배 가운데 미디어가 수단인지, 목적인지 물
어보고 싶다. 물론 예배를 돕는 수단과 방편
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아가 눈여겨본다면 그것들은 예배와의 소원
한 관계를 넘어 무의식중에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고가의 미디어장비가 수반하는 재정의 문제도 동반한 체 말이
다.
“상형 문자나 표의 문자 같은 차가운 미디어는 뜨겁게 외파(外破)하는 표음
문자인 알파벳과는 매우 다른 효과를 가진다. 알파벳은 추상적인 시각적 밀
도가 아주 높아졌을 때 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독점 현상들이 사람
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비개성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다시 집단성에 호소하게
되자, 전형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쓰기라는 미디어를 아주 강렬한 형태, 즉
반복이 가능한 인쇄라는 형태로 가열했고, 그 결과 16세기에는 민족주의 나
타나고 종교 전쟁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미디어의 이해 중에서).
맥루언은 미디어에 뜨거움과 차가움을 도입했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
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것으로 차가운 미디어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쓰
기라는 미디어를 아주 강렬한 형태, 즉 반복이 가능한 인쇄라는 형태로 가열
했고,
그 결과가 민족주의, 종교개혁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이다. 여
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사진은 시각적인 면에서 고
밀도다. 반면 만화는 제공되는 시각적 정보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저밀도이
다. 전화는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빈약하기 때문에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의 미디어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
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가운 미디어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
다. 따라서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
도가 높다. 맥루언은 우리시대에 “뜨거운 형식이 배타적이고 차가운 형식이
포괄(용)적이다”는 원리를 입증해 주는 사례들이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다.
맥루언의 예언을 소개하고자 함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공예배는
미디어로부터 배타적인 영역에 서게 되었다. 우리시대 교회들은 미디어의 뜨
거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어떤 예배
와 찬양을 받으시며 그
가 세운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 주의 날이 어떻게 시
작되었고 어떻게 임하게 될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교단마다,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에서 미디어는 이
용되어 왔다.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유행을 조장해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는 열등한 교회로 낙인되었고, 급기야 교회에서 성경을 몰아내고
말았다. 맥루언의 예언처럼 교회는 ‘기계장치 애호가'(나르코시스)로서의 나
르시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감각마비의 혼수상태에 빠져 무한정 자신을 확장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교
회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돌아보는 일이 시급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
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죄로 미디어는 왜곡
되어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주의 날을 사모하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
은 예배의 방편과 대상이 전도된 현실을 심각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배 방식이 결코 목적일 수 없어
여기에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 ‘창조에 대하여’에서 말하고 있는 “성부, 성
자, 성령이 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권능과 지혜와 선하신 영광을 나타
내
시기 위하여 태초에 무에서 모든 것, 즉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지
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하였다”는 의미를 다
시 점검해야 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