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생각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얻은 깨달음
민경희 사모_평안교회
조금 높은 위치에 달려있는 화장실 휴지가 가끔 주르륵 내려와서 바닥에 겹
쳐있는 걸 봤다. 이게 왜 이러지? 하면서 다시 감아 놓기를 몇 번 했는데 남
편이 드디어 막내에게 한 마디 했다. “너 휴지 풀려 내리지 않게 신경 써
서 쓰거라”. “어~ ? 제가 그러지 않았는데요? 나도 들어가면 그렇게 돼있
을 때가 있던 걸요?” 그 후로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었지만 말도 못하
고 세 식구가 서로 범인을 찾지 못했다.
인생은 풀려진 두루마리 화장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고 말
했다. “야~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우리 인생이 두루마리 휴지 같다고 하더
라?” 시중에 유행하는 각종 우스개시리즈를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내게 새
로운 걸 들려주면서 내 반응을 재미있어 하는 친구다.
미국에 있는 손자들도 보고 재미있어 한다고 해서 ‘웃찾사’ 니 ‘개콘’
이
니 일부러 좀 보려 해도 빠른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
람들이 왜 웃는지 이해 할 수가 없고 남편도 같은 상태라 아예 우리 부부는
오락프로를 보지 못한다. 그런 내가 인생과 두루마리 휴지의 심오한 역학 관
계를 어찌 알겠는가?
두루마리 휴지가 새 것일 때는 얼마를 써도 표시가 나지 않지만 점점 줄어드
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인다는 거다. 그렇게 우리 인생도 젊어서는 시간이 가
는지도 모르게 세월이 가다가 어느새 60을 바라보는 우리 나이가 되면 시간
이 너무 빨라서 두루마리 휴지 줄어들 듯이 눈에 보이게 시간이 사라져 간다
는 거다. 집에 돌아와서 손을 씻다가 조금 남은 휴지가 저절로 스르륵 풀리
는 걸 목격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젊은 한 때는 시간이 흘러가는 건지 도대체 언제 세월이 지나가나 지루하기
도 했고, 지금 내 나이를 살고 있을 나를 상상하지도 못했다. 모두들 그렇듯
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 때 알았더라면’ 하고 회한을 갖는다. 그건
자녀를 기르는 문제에서 가장 아픈 회한이 남는 것 같다.
세 아이들을 기르면서 너무 유난하다고 주위에선 할머니가 손자를 키우는
것 같
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당시에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건 물론 말
씀 안에서 진리와 교양으로 참된 훈계로 양육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뜻
을 받아주고 아이들 위주로 산다는 지적이었다. 특히 위로 두 아이들은 하나
님의 자녀가 아니라 ‘내 아이들’이었다.
어쩌다 안고 내 품에서 잠이 든 아이를 잠시 맨 바닥에 눕히는 것도 싫어서
잠이 깰 때까지 안고 있기도 하고, 4살짜리 딸에게 돌을 던져서 울린 동네꼬
마를 쫓아가서 결국은 엄마 뒤로 숨은 녀석과 아이의 엄마까지 울리고 개선
장군처럼 ‘예쁜 내 딸’을 업고 돌아오기도 했었다. 버스에서 내려 잠이
든 ‘귀한 내 아들’을 깨우기가 안쓰러워서 집까지 땀 흘리며 업고 갔다는
걸 친구는 지금도 기억한다. “세상에~ 너 그때 그 녀석 3학년이었을 게
다.” 내 옹색한 변명은 “아니, 2학년이었을 걸?” 하는 정도다.
늦게 낳은 막내까지 모유로 키우면서 아이들 이가 나기까지 젖을 떼지 못했
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엄마 가슴을 만지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 때문에 나
도 행복했고 누구 앞에서도 나는 우선 우리 아이들 편이었다. 친구를 때렸다
고, 규정에 벗어나는 머리를 했다
고, 구두를 신었다고, 여러 이유들로 학교
에 불려가서도 나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할 말이 많은 엄마였다. 여러 아이
들 속에서도 나는 ‘내 아이’를 찾아냈고 단 몇 명이 놀고 있어도 내 눈에
는 ‘내 아이’ 곁에 누가 있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는 엄마의 사랑과 헌신을 주로 기억하고 두 아이는
시댁에 다녀오면서 괜히 잘못 없는 아이들에게 신경질 내고 ‘지겹다’고 불
평하던 엄마의 부족함들을 더 기억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장성한 아이들
이 엄마를 이해해주는 것이 고맙고, ‘내 아이’들을 내가 붙들고 있는 동안
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인도하시고 자라게 하
신 은혜를 감사한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서 부족한 며느리를 참아주신 시댁 어른들이 감사해서 회
개하던 그 때 내 나이 서른보다 이제 내 딸이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시어머님의 모진 몇 마디 말씀에 가슴이 아파서 절절매던 딸은 그래도 2년쯤
이나 손자를 보러오지 않는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봄에도 함께
기도하고 꾸짖기도 했지만 용서하기 싫어서 시어머님이 잘못했다고 사과하실
까 봐 걱정이 된다
면서 울던 아이다. 그저 먼 나라에 있는 딸을 위해 혼자
기도하다가 며칠 전에는 사모로서 성도를 권면하는 심각하게 긴 편지를 썼
다. 다음 날 보내려는데 늦은 밤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딸아이가 벌써 서른이 넘다니
“엄마, 시어머님 한 번 오시라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신기하게 미운 생각이
하나도 안 나요. 미움이 다 없어진 것 같아요.” 예쁜 우리 딸의 낭랑한 음
성이 노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