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아 실_유화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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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아 실

유화자 교수/ 합신 기독교교육학 

얼마 전 한 대학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여러 이유로 종종 이 병원을 찾게 
되는데 그러던 어떤 날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병원 구내여서 서서히 운전
을 하고 가던 필자의 시야에 낯 선 진기한 모습이 들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영안실’이 있던 건물에 ‘영아실’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건물이 바뀌었나?”라는 궁금증으로 그 부근을 유심히 살피며 운전
을 하던 필자의 눈에는 외형적으로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건물의 
위치나 건물 자체, 그 주변의 상황 등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영
안실’이 있던 자리에 ‘영아실’이 있었던 것이다. “신생아들이 태어나는 
곳 영아실? 건물의 모습이나 주변 분위기가 아무래도 신생아들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 ·! ” 

나는 궁금증을 안고 운전을 계속하면서 무엇이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
는지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으
며 참으로 놀랍고 당황하게 되었다. 바로 ‘영안실’이라는 단어에서 ‘안’
이라는 글자의 ‘ㄴ’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받침 하나로 ‘영안
실’이 ‘영아실’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나는 ‘영안실’과 ‘영아실’이라는 두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처음에
는 구별하지 못하고 “영아실?” “영안실?”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그 
두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상이성(Differences)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두 단어의 발음이나 글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는데, 그 두 단어 사이에 존재
하는 엄청난 의미의 상이 성에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영아실’과 ‘영안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한 사람의 전 일생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 사람이 생명을 받아서 이 지구 위에 인생으
로 태어나는 곳이 ‘영아실’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긴 생애를 마치고 이 
땅을 떠나는 곳이 ‘영안실’인데 이 두 단어 사이에 끼어 있는 ‘ㄴ’이라는 
작은 한글 받침 속에 한 인간의 전 생애가 출생부터 임종까지 그 속에 공존

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놀랍고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을 웃기는 일을 천직으로 삼는 개그맨들에게 이 소재를 제공한다면 그
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희대의 개그맨 찰리 채플린이 그 현장에 있었다
면, 그의 개그의 천재성으로 이 기막힌 현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역사에 남을 만한 개그의 명작을 연출해 내지 않았을까?(그 병원의 
‘영아실’의 ‘영안실’ 복귀에는 다행히 수 십 년이 아닌 몇 개월이 걸렸음
을 후에 알게 되었다.) 

한 대학 병원 방문 길에서 어느 날 받았던 충격과 놀라움이 개그맨의 입장에
서와는 다른 측면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였다. 지금까지 지구 위에서 
인생을 살다간 무수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또 60억이 넘는다는 현존하는 지
구 위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영아실’과 ‘영안실의 입
실’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
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이 땅위에 온 것도, 자신의 의지로 생사를 마감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도 결코 아니다. 그렇게도 늙음과 죽음이 싫어서 신하들
에게 불로
초 구함을 강요하였던 진시왕도, 세상에서 건강에 좋다는 모든 것
을 일생에 다 동원하였다는 김일성도 이 세상 어디에 현존하고 있는가! 

인간이 태어나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
의 아들의 생명 값으로 사신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한 인생을 마치 하룻길 소
풍 놀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생각하고 인생이 힘들다고 조금 어렵다고 쉽게 
삶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불경이라 할 
수 있다. 

‘영아실 입실’에는 순서가 있지만 ‘영안실 입실’에는 순서가 없다. “아
직 순서가 아니라고 너무 빠르다”고 안타까이 몸부림치며 ‘영안실 입실’
을 거부하려는 사람도, “인생이 너무 길다고 이제 충분하다”고 삶을 지겨워
하며 ‘영안실 입실’을 서두르는 사람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안
실 입실 결정’ 앞에서는 할 말도 거절의 방법도 없다. 

우리 모두는 순서를 따라 이 땅 위에 왔지만 하나님의 ‘무순서의 부르심’ 
앞에는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 훌훌 털고 돌아가야 할 사람들 
아닌가! 언제
든 그 분의 부르심에 기쁨과 감사로 응답할 수 있는 준비된 소중한 삶을 모두
가 살도록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