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의 목회편지(116) 딤전 6:12
영생을 취하라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 가운데 “초기 카톨릭주의”(Early Catholicism)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에서
나온 전문어이다. 신약성경 기록이 막 종료될 시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
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서 세계의 교회를 강력한 조직으로 묶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다.
종말 공동체에서 현실 바라봐
이렇게 하여 어느덧 1세기 말의 기독교는 종말 공동체에서 현실 공동체로 탈
바꿈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종말이 아니라 현실이
라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초기 카톨릭주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에 흩어진 교회는 점점 집중화되고, 조직화되고, 현실적이 되었다. 그러
다가 마지막에는 로마 카톨릭과 같은 작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 그럴듯한 해석 방식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여기는 그것들을 제시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단지 이 주장을 바라보
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주장이 초기 기독교의 상황보다는 현재 기독교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론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현대의 기독교를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을 얻는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발된 이론
이 현대 기독교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더 잘 맞는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그만큼 현대 기독교는 카톨릭주의의 원단(元旦)으로 너무나도 열심
히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이런 귀환성이 너무나 강하고 다양해서 작은 지면에 일일
이 다 적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성직자주의는 언제나 우리
가 경계해야 할 큰 위험요소이다. 목회자가 경건보다는 외형으로 일반 신자
들과 구별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적 교훈과 가르
침을 버리고 계급과 조직을 강화하여 왕처럼 군림하는 것, 이런 것들은 매
우 위험한 발상이다. 한 교회가 제도적으로 수하에 여러 교
회를 거느리는
것, 정당성이 없는 온갖 기막힌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식에게 목회를 세습하
게 하는 것, 이것도 역시 모두 성직자주의의 일환이다.
이와 연관해서 더 생각해 볼 것은 기독교가 물질주의의 지독한 감염에서 도
무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필요한 교회
건물에 불필요한 고가의 실내장식을 더하느라 열을 올리고, 세상에서 경제적
으로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복 중에 복인 것처럼 자랑한다.
물질주의는 결국 실적위주의 선교를 낳는다. 실적을 요구하는 본국 교회의
눈을 의식하여 선교사들이 한 달, 두 달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자신이 행
한 세세한 일들을 보고하려고 며칠이나 끙끙대며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바람
직한 일이 아니다. 세속의 물결이 기독교의 중심에서 범람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침몰하는 현장에는 꼭 신비주의가 있다. 신비주의는 영적
몰입을 바탕으로 하는 신비한 체험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을 형성한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아말감으로 때운 치아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금니로 변
한다는 괴상한 가르침이 인기를 얻는다.
현대 기독교는 신비주의의 유혹
에 약하다. 그래서 기독교는 미신과 크게 다
를 바 없는 종교로 타락하고 있다. 어디엔가에서는 주기도문을 만 번 외우
면 무엇이든 소원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설교가 버젓이 행해졌다니 정
말 가소로운 일이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들이 발생한 까닭은 기독교가 현실에 지나치게 목
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영생을 취하라”고 권면함으로써 기
독교의 본질이 여전히 현실 저 너머에 있다는 진리를 설파하였다. 영생이란
이미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
는 사람들의 “여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저기”에 있다.
기독교 본질은 현실을 초월해
현실은 영원에 의하여 해석될 때만 참된 가치가 있다. 본래 이것이 기독교
가 줄곧 가르쳐온 진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는 현실에 골몰하여 영원
을 잊어버렸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책임질 수 있겠는가?
목회수상
안 나누면 불량배
‘악한 불량배들’이라는 표현은 뒷골목에서 깍두기 머리에 검정양복을 입
고 주먹다짐을 하며 살며 때로는 쇠파이프와 회칼로 무장하고 패싸움을 벌이
는
자들을 연상하게 한다. 만약에 어떤 목사가 불량배들을 기반으로 삼아 교
회를 세운다면 그 교회의 모양새는 어떻게 될까? 혹시 어떤 사람이 불량배들
을 기반으로 국가를 세웠다면 그 국가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이익만 구하는 사람들
교회이면서 동시에 국가인 다윗 왕국이 세워질 때 다윗을 따르는 무리 가운
데 악한 불량배들이 있었다고 사무엘상 30장 22절에서 말하고 있다. 살기등
등한 사울을 피하여 국외로 떠돌던 다윗이 아둘람 굴에 정착했을 때에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및 전국에서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두 다
윗에게로 모였다.
그들은 모두 사울의 통치하에서 약자들이었고 부당한 대우를 감당하지 못한
피해자들이었다. 다윗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은 그런대로 다윗을 잘 따랐고
그 중에는 후에 엄청난 용사가 된 자들이 많다. 다윗은 이들을 데리고 그일
라를 구출한 적도 있고 후에 블레셋의 시글락에 정착한 후에는 이들과 함께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을 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런 다윗에게 어느 날 위기가 닥쳤다. 블레셋 왕 아기스가 이스라엘과 전쟁
을 시작하면서 다윗에게 동참하라
고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아기스의 다
른 부하들이 다윗은 믿을 수 없으니 전쟁에서 제외시키라고 요구했다. 다행
스럽게 전쟁에서 제외된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시글락은 아말렉 사
람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
말렉을 추격하여 모든 포로들과 전리품을 되찾아왔다.
그런데 아말렉을 추격할 때 부하 가운데 너무 지친 200명을 중간에 머물려
두어 짐을 지키라고 했는데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전쟁에 가담했던 400명 중
에 어떤 사람들이 낙오했던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나눠주지 말자고 주장하
는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그저 가족이나 돌려주어서 떠나가게 하자고 했
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고한 사람이 이익을 차지하는 것은 맞다. 적자
생존원칙에 의하면 무능한 자들은 도태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무엘상 기록자는 “악한 자와 비류들”이라고
부른다(삼하 30:22 개역성경, 개역개정판에는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
고 표현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
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주신 것
을 모든 형제들이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옳다
고 하여 그것을 이스라엘의 규례로 삼았다.
다윗의 부하 가운데 불량배가 있었다는 말은 어딘가에서 건달들의 무리가 다
윗 휘하에 들어왔다는 말이 아니다. 이 사건 이전에나 그 후에는 다윗의 부
하 가운데 불량배들이 있었다는 말이 전혀 없다. 결국 그들이 악한 불량배들
이라고 불린 것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
이다.
즐겨부르는 복음송 가운데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라는 노래가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실제로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의 모습
은 자기 것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유무상통한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
뒷골목 건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은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며 자기
만 가지려고 하는 자들이다. 더 많이 가지려고 무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남
을 죽이기까지 하는 자들이다.
다윗의 부하 가운데 악한 불량배들은 약자들은 떠나보내고 강자들끼리 전리
품을 더 많이 차지하자고 했다. 모든 복과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것
을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한다면 이처럼 악한 불량배가 된다. 그런 자
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다행한 것은 다윗
의 부하 가운데 일시적으로 불량배처럼 행동했던 자들은 다윗의 강력한 리더
십과 사랑의 법칙에 순응하여 다윗왕국의 세우는데 일등공신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리품을 우리에게 나눠주면서 함께 살자고 하셨는데
이젠 우리 차례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리품을 더 연약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함께 살도록 배려하자. 물론 다윗의 부하들처럼 오
늘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데 동참하려고 나선 제자들 가운데에도 그리
스도의 사랑의 법칙에 더디게 적응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우리 중
에 누구든지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서 주인공 임상옥은 상인의 최종 목적은 돈이 아니
라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최종 목적은
천하보다 귀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사
실을 명심하자.
사람을 얻는데 목적 있어야
하나님이 주신 복은 나만을 위한 것
이 아니라 지경을 넓히라는 수단으로 주
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경을 넓혀나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
에 복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