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게 짐 지우지 말라 _조병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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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의 목회편지(95)

교회에게 짐 지우지 말라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자기의 유익을 챙기려고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은 참으로 악하다. 교회가 어
지럽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데 
있다. 때때로 이런 자들은 아주 신앙심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가장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며 교회와 밀착하면서 악
착같이 기생한다. 

교회에서 기생하는 사람 있어

그들은 교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칭찬 받을 곳과 비난받을 곳
을 약삭빠르게 알아채고 절대로 손해를 당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들은 교
회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므로 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
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침내는 자기를 위한 목적을 이룬다.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자들은 단순히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
니다. 가끔은 순전히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람에 교회
를 이용해먹은 결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것은 그래도 눈감아 
줄 수 있는 경우이다. 또한 그럴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교
회의 일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가운데 이런 일이 벌
어질 수 있고 그래서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교회
를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처사는 악하다. 온갖 치장을 다하여 겉으로는 신
앙이 깊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챙기고 교회에는 짐만 
지우는 자는 정말로 악하다. 
과부에 관하여 자세한 교훈을 제시하던 사도 바울이 말미에 교회에 짐을 지
우지 말라는 말로 골인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도 바울은 믿는 여자
가 스스로 과부친척을 도와주지 않고 교회에 짐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
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아무 친척이 없어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
고 있는 외로운 참 과부(딤전 5:5 참조)를 도와주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된
r
다.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은 교회의 진로를 막는다는 점에서 심지어 사탄의 행
위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교회에 짐을 지우는 행위에 관
한 사도 바울의 지적은 바로 앞에서 대적자 사탄을 언급한 것에 이어지고 있
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딤전 5:14-15 참조). 다시 말해서 대적자 사탄
의 악한 작업 중에 한 가지 예는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다. 
신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교회에 미루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하기에는 
너무나 귀찮기 때문에 교회에 일을 떠맡기는 것은 나쁘다. 자기를 즐기는 
데 시간을 다 소모하고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자기의 일을 교회에 넘겨버
리는 것도 나쁘다. 자기의 돈이 드는 것이 아까워서 교회의 경비를 빼 쓰는 
것도 나쁘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자기의 유익을 챙기겠다고 교회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통해서 장사하는 것, 예를 들어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고객을 확보
하려는 심보는 악하다. 교회를 선거의 표밭으로 만드는 것이나 인기몰이를 
위한 도구도 전락시키는 것도 악하다. 소설이든 영화든 교회를 돈벌이의 재
료로 삼는 
것도 악하다. 이런 행위의 배후에는 모두 대적자 사탄의 조종이 
숨어있다. 
자기가 즐기는 경비를 교회에 물리는 목사, 자기가 파는 물건을 교회에 강
매하여 들여놓는 장로, 교회의 물건을 마치 제 물건인 것처럼 사용하는 집
사, 하다 못해 교회의 정수기 물을 통으로 받아다 제 집 식수로 사용하는 성
도, 이것은 모두 대적자 사탄의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라. 

교회는 돈벌이 대상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가운데 교회를 훼방할 기회를 노리는 대적자 사탄에게서 
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아주 짧은 한 순간이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
해서 교회를 이용한다면 우리는 벌써 사탄의 편이 서 있는 것이 된다. 그래
서 자기가 짐을 지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은 우리가 애써 피
해야 할 일이다. 
교회와 가장 가까이 있는 중에도 사탄과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
해하기 어려운 것인가?

신학과 목회 – 그 행복한 만남을 위하여 <3>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는 합동신학대학원의 표어이다. 매우 지혜
롭고 성경적인 표어라 생각한다. 한편 우리
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은 바른 신학은 신학교에서, 바른 생활은 집이나 사회에서, 바른 교회는 교
회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조화를 이루어 우
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삼정(三正) 사상 조화 이뤄야

바른 생활과 상관없는 바른 신학은 있을 수 없고 바른 신학 없는 바른 교회
는 불가능하다. 또한 바른 교회는 바른 생활과 뗄 수 없다. 그 이유는 한 마
디로 하나님은 나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학 혹은 교리는 반드시 하
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 지식적 체계로 끝나는 신학은 하나님의 성품
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지식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생활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결여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과 ‘인간을 아는 지식’
(knowledge of man)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른다고 고백
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 특히 우리 죄성을 몰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우리 생활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앎과 신학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1:7)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
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의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
다. 성경 원리와 성경 메시지는 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원리를 알면서 성경의 내용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
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연결되는 행동의 명사이다”라
고 말한다. 즉 모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모든 성경의 구절들은 역사하
시는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연결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솔방울에 관해서 색깔, 모양, 씨, 사용처 등을 아무
리 잘 묘사하고 잘 안다고 해도 소나무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솔방울
을 파악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우리 신학은 반드시 삼위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결코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따로 둘 수 없을 것이
다.
바울
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
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
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
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1-8).
여기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은 단지 정보나 지식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
다. 
우리가 각기 바른 신학과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잘 이루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를 잘 조화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조화의 작
업은 
구석에서 되어질 일이 아니고 또 몇 사람에 의해 되어질 일이 아니다. 
신학교와 현장과 교회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개혁주의의 모토인 ‘하나님의 주권’은 신학적으로만 세워
질 수 없다. 아무리 신학적,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논한다고 해도 마
른 빵 조각 앞에 기도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변적 넋두리에 불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지식, 삶, 교회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
야 한다.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그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자주 강조했던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하
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이다”(Theology is not a science of knowledge 
about God, but an art of life unto God)라는 말이 있다. 신학교는 어떤 지
식적 체계만을 공급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을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와 우리 삶의 현장도 그러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삶의 예술 위한 것

예술은 지식만 갖고 되지 않는다. 바울이 디도에게 말씀하는 바 절제, 경
건, 근신, 믿음, 사랑, 인내, 선한 일, 경건함, 부패치 
아니함, 바른 말 등
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
은 신학과 생활과 교회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바
른’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