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2:9-10)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여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다. 남자는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여자는 남자
의 몸에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서는 여자가 그냥 웃는 것만으로도,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것만으로도, 눈
짓하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멋이며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세계에서는 머리
를 꾸미고 몸을 장식하며 좋은 옷을 입지 않아도 여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
이었다.
사도 바울은 창조와 타락의 전망에서 여자의 위치를 바라본다 (딤전 2:13-
14). 사도 바울의 시각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다. 비록 선명하게
언급은 하지 않더라도 신학적 시각에서는 당연히 창조와 타락에 이어 구속이
라는 차원이 첨가된다. 사도 바울은 구속이라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고 있
다. 구속의 위치에서 창조와 타락을 조망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구속의 위
치에 있는 여자들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여자들” [문자적으로는
“경건을
고백하는 여자들”], 2:10)이 어떤 멋을 지녀야 할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타락세계의 멋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멋이어야 할 것이
며,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창조세계와 맘먹는 구속세계의 멋이어야 할
것이다. 창조세계에서 여자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인 것처럼, 구속세계에서도
여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다.
구속세계에 들어와 있는 여자의 멋은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
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무조건 도매금으로 악한 것이라고 밀어붙
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여자는 단장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여자가 단장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이
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떻게 단장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
는 것이다. 단장이 문제가 아니라 단장의 방식이 문제이다. 그래서 대조되는
것은 단장한다와 단장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염치와 정절을 갖춘 아담한
옷”과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이다. 사도 바울은 구속의 세계
에 들어와 있는 여자가 멋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다. 단지 어떤 방
식으로 멋있어야 하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신앙의 여성을 가장 멋있게 만드는 것은 선행이다. 선행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는 여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선행은 여성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 여기에 여성의 미
를 위한 사슬이 성립된다. 여성의 멋은 아담한 옷에서 나온다. 아담한 옷은
염치와 정절에서 나온다. 염치와 정절은 선행에서 나온다. 선행은 경건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여자의 멋을 결정하는 것은 경건이다. 경건을 갖춘 여자는
그냥 웃는 것만으로도, 손짓으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요란하게
머리를 꾸미고 찬란한 보석을 차고 고가의 의상을 걸치지 않아도 된다. 경건
이 외모를 찬란하게 만들고 세안수가 여성의 피부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
니라 경건이 정결하게 만든다. 화장품이 피부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
라 경건이 찬란하게 만든다.
경건은 여성의 멋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남자들에게 기도를 요
구한다면 여자들에게는 경건을 요구한다. 선행은 여자의 멋을 결정한다.
아합의 왕후 이세벨
이 반란군을 이끈 예후가 죽음의 칼을 들고 방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며 화장하는데 열중했다는 것은 소름끼치
는 일이다. (왕하 9:30).
경건이 없는 여자는 그 자체로 추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