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 (딤전 1:20)
조병수 교수/ 합신신약신학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도 바울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이름을 호명하면
서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말했을 때. 사도 바울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
에 파선한 사람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라고 지적
하였다. 사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자리에 도달하게 되었는
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인 “훼방하지 못하게”라는 표현
은 이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믿음과 양심을 근간으로 삼는 기독교의 진
리를 훼방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둘째 편지
와 연관하여 볼 때 후메내오는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사람이며 (딤후 2:17-
18 참조)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에게 많은 해를 보인 사람이다 (4:14 참조).
어쨌든 분명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들의 마지막 자리가 믿음을 파
괴하고 양심을 포기한 상태라는 것으로부터 그들은 매우 극악한 행위를 저질
렀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
나 악질적인 것이었으면 사도 바울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명시하기까지 했을까.
비록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좋은 의미
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가인이나 고라
나 발람의 이름과 같이 이 사람들의 이름도 성경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그것
은 오명이다. 성경책을 읽다가 이 단락에 이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수치스런 이름이다. 이 땅에서 성경책의 마지막 한 권이 사라질 때까지 남을
부끄러운 이름이다. 차라리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보다도 훨씬
못한 더러운 이름이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역
겨움을 숨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을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말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이 사탄에게 내어줄 정도로 문제가 심각
한 사람들이었다.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겨우 한 두 번 사
용한 희귀한 말이다 (고전 5:5 참조). 이것은 기독교로부터의 출교라든가 질
병이나 죽음에의 양도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사
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이 단절과 악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탄에게 내어
진 사람은 기독교회로부터 끊어지고 악한 상황에 말려든다. 그는 더 이상 하
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으며 도리어 이제부터 사탄의 고통을 체험하게 된
다. 이와 같은 표현이 절대적이며 종국적인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아무런 보장이 없다. 그저 사탄에게 내어주는 목적이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는 사도 바울의 부연이 정말 만에 하나 긍정적인
해석을 가하게 할 뿐이다. 만일에 사도 바울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
게 내어준 목적이 그들을 멸망에 처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더 이
상 아무 말도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징계를 받아…”라고 말
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이처럼 극악한 무리
에게도 일말의 소망을 걸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이름들이 오명인 까닭은 그것들이 발음하기 힘들거
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름의 모양이나 이름의 의미가 중요
한 것이 아니다. 이름이 아무리 발음하기에 좋고 기가 막힌
뜻을 가지고 있
다 손치더라도 그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이 조금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만
큼 악한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더러
운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름보다도 그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의 됨됨이이다. 사람이 훌륭한가 못났는
가에 따라서 그의 이름도 훌륭한지 못났는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까. 믿음과 양심에 조화를 이루어 선한 싸움
을 싸우지 않으면 우리도 결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영적인 세력들을 항복시키고 돌아온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눅 10:20)고 하신 말
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