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석학(New Hermeneu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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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해설

7. 신해석학(New Hermeneutic)
일반적으로 ‘해석학’하면 어떤 텍스트(성경도 포함하여)를 해석하는 방법이
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배경이나 문법적 분석 등을 포함
하여 텍스트를 구성하는 언어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틴 하이데거
는 해석학이란 단지 언어들의 해석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실재(reality)를 해
석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언어 자체가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
재 자체가 언어라는 방편을 써서 스스로 말하게끔 해야 하는 것이 해석학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청취자(hearer)와 실재(reality) 사이에 언어라는 
방편을 통한 실존적인 조우가 있을 때 그 언어는 바로 이해된다고 한다. 그러
므로 해석은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 아니라고 하며, 언제나 우리는 선
이해(preunderstanding)를 가지고 텍스트를 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
거의 후기 사상과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신학이 신해석학의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신해석학
을 대변하는 학자로는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 게하르트 에벨링
(Gerhard Ebeling),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불
트만적 해석학을 따르며 주장하기를 전통적 해석학은 너무 범위 좁다고 한
다. 단지 언어들만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더 넒은 해석, 
즉 일반적 인간 이해를 포함하는 해석을 요청한 것이다. 이 인간 이해는 인간
이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을 살핌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어진 텍
스트의 역사적 상황과 현재의 독자의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가 
그들의 해석의 관건이라 하겠다. 그들은 실존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연
결시킨다. 아무리 시대의 차이가 있고 같은 시대에 있어서 해석들이 달라도 
해석을 하고 있는 해석자 존재와 그가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과의 관계는 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푹스의 다음과 주장을 통해 이들이 주장하는 선이해
(preunderstanding)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가
족들간에는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때문에 말한다. 이것이 나의 출발점으로 사용되는 진술
이다”라고 했다.

신해석학의 핵심적 개념으로 ‘언어 사건’이 있다. 이것은 단지 정보가 아니
라, 인격체로서 하나님 자신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새로운 자이
해(self- understanding)를 낳는다고 한다. 그래서 신해석학자들은 사상이 언
어를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상을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
가 말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우리를 해석한다고 한다. 푹스는 심지
어 “인간이 언어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언어를 낳은 것이 아니라 인
간은 언어로부터 태어났다”고 한다. 이말은 인간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
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의 생각과 사상을 만들고 조정한
다는 것이다. 언어는 일하고 언어는 발생된다는 것이다. 에벨링은 ‘언어사
건’이라는 말 대신에 ‘말사건’이라는 표현을 한다. 물론 같은 의미이다. 에벨
링은 “해설되어야 하고 해설이 필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본문이 아니다. 이
제 우리는 본문의 목적이 그 자체가 해설하고 조명하고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
을 본다. 본문은 거기에 그 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기원이

며 미래일 말 사건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언어사건(말 
사건)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
라 계속적으로 텍스트가 해석자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해석학을 살핌에 있어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와 연결시켜야 
한다. 당시 유행되었던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란 비판적 시각으로 객관적인 예수의 행적을 조사하고 복음서는 어떤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불트만 역시 역사적 예수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예수가 역사적 인물로 존
재하였다는 것은(that) 우리가 알지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how) 모른다
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Kasemann과 Bornkamm) 불트만은 예수를 단
순 사실(that)로 보았지 예수에 대한 신학적 의미(how)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비평한다. 케리그마란 이미 역사적 인물에 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는 그 인물에 대해서도 탐구를 해야한다고 반박하였다. 즉 왜 다른 사람이 아
니고 하필이면 예수라는 인물이냐는 것이다. 바로 
신해석학자들은 이러한 “역
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와 같은 노선을 걷는다. 푹스는 “소위 믿음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역사적 예수이다”라고 한다. 즉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
수의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해석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가 참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대 교회의 설교(케리그
마)에서 그것의 초월적 근원을 찾자는 것이다. 즉 그 근원은 바로 예수 자신
의 설교에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에서 발생된 언어사건을 찾자는 것이다. 예
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상황,’ 즉 그가 처한 구체
적 상황에서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포하는 그의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나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를 찾자는 것이지 그 역사적 예수가 참 하
나님이요 참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해석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비평할 수 있다. 사실 해석학
의 넓은 범위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성경)이 지금 우
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찾는 것은 해석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
다. 그러나 신해석학
은 어떤 객관적인 텍스트를 부인한다. 그런데 어떻게 객
관적이 아닌 그 무엇이 해석자에게 어떠한 것을 줄 수 있는가 말이다. 실존
적 조우라 할지라도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객체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것
은 실존적 충격일 수도 있고 추상적 관념일 수도 있고 언어로 통한 미적
(aesthetic) 통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객체없이는 해석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 말씀을 객체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되는 가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언어들에 내재해 있는 실존적 의미 혹은 힘
이 어떻게 언어 구조와 연결되는 지를 신해석학은 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다. 언어 자체도 중립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정해지고 전달
되는 것이다. 언어에 생내적으로 실존적 의미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
러 루우트로 의미가 부여된 언어를 신해석학자들은 실존적 매개체로 사용하
여 실재(reality)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