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목회 15년에 대한 소고(小考)_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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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15년에 대한 소고(小考)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설교자는 자기가 원하는 내용만을 전하는 것도 아니며, 청중이 원하는 내용만을 전하는 방식도 아닌 오직 복음이 선포되고 수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필자는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 10월에 목사 안수를 받은 ‘20세기 목사’이다. 그런 중에 벌써 2015년이 되었다. 목회 경력 10년에 이르러 ‘목회 10년의 성찰’(省察)을 썼는데, 그때는 칼빈처럼 꾸준히 사역하며 학문을 연마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던 중 벌써 5년이 흘렀다. 우리의 목회 환경은 더욱 악화되며 부정적인 정보로 가득하다. 2014년에는 목회 연구에서 ‘목사의 이중직’을 허용하자는 학술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심각한 목회 환경이 완전히 공개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목사에게 목회 외의 경제활동이 침묵이나 방조가 아닌 공식화되고 장려되는 경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목사는 목회를 해야 하는가?

아래의 글은 15년 목회 과정 중 초년 말년병의 짧은 생각이다. 목사가 이중직이니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목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달은 체계적인 훈련이 있어야 하는 고도의 이성적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1. 목사는 성경 전문가이다

 

성경 전문가는 교회에 관한 모든 분야, 신학, 역사, 문화, 교회행정, 교회정치에서 전문가이다. 전문가는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 경륜, 시행착오 등을 통해서 갖는 시간과 땀의 산물이다. 목사는 목회 시간이 경과하면서 목회에서도 자기의 전문분야를 찾게 된다.

그런데 간혹 레져형이나 목회 외적 요소로 방향을 잡은 경우도 있다. 전문성을 위해서 목회 10년 초년에 고백하였던 꾸준한 공부가 필수적이다. 필자는 목사후보생들에게 공부를 좋아하는지를 묻는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해도, 공부를 좋아해서 목회에서 꾸준히 성경을 탐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1. 목회 15년에서 깨달은 것은 목사의 능력 부재이다

 

한국 사람은 빠른 지식의 습득을 원하고 자랑한다. 3박 4일에 성경 66권을 마스터할 수 있다고 한다. 좀 약하게 모세오경, 마태복음을 정복하기도 한다. 천만 원 수강료의 설교법 강의도 있다고 한다. 하루 만에 영어도 마스터 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처럼 비법(秘法)으로, 돈을 들여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기하학(학문)에는 왕도가 없다(유클리드)”는 말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꾸준히 노력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4년 대학과정에서 전문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고, 회사에 입사해야 전문가가 된다. 신학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초신학소양과 목회현장에서 연구한 학문에서 전문지식이 발생한다.

그런데 전문가적 노력이 없다면 전문가적 소양은 없고 결국 형식적인 모습, 자격증만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곧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도 전문가적 위치에 오르지 못하는 ‘능력의 부재’가 절실하다.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지 매우 힘이 든다. 또 잘 전달이 되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설교자의 능력의 부재는 설교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성경본문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성경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다양한 지식들을 통합하고 재배열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전달하는 능력 그리고 청중의 이해 정도를 판단하는 능력 등이 설교자의 능력이다. 기본적인 목사의 능력을 ‘성경본문 독해능력’, ‘이해된 복음을 전달하는 능력’, ‘청중의 수용성에 대한 측정능력’으로 본다.

 

  1. 목사의 능력 부재보다 큰 문제는 청중들이 바른 설교거룩한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중이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목회자에게 편한 길이지만, 거룩한 공교회를 이룰 수 없는 심각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16세기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 상황도 동일하다.

당시 제네바는 바른 설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교에 대항할 수 있는 자구책을 필요로 하였다. 칼빈은 그런 상황에서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도시’로 만든 세계역사의 유일한 사역자였다.

칼빈은 자신이 추방당한 제네바에 다시 복귀했는데, 그때에도 제네바는 칼빈의 지도를 받지 않았다. 칼빈의 지도력이 효과적으로 형성된 것은 그로부터 약 15년 정도 지난 뒤에 일어났다.

화형 받을 죄인인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칼빈을 대적하는 세력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르베투스의 죄목이 ‘삼위일체 부정’으로 당시 너무나 확연한 종교, 정치범임에도 그를 지지하며 칼빈에 대항하였다. 그러한 시민들, 청중들을 향해서 칼빈은 성경을 바르게 설교하며 정진하여 결국에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세웠다.

현재 우리의 환경도 유사하다. 바른 설교를 원하지 않는 청중들에게 바른 설교를 해야 되는 과제가 있다. 이 때 설교자가 취해야 될 과제가 ‘천천히’라고 생각되었다. 중국말로 ‘만만디(慢慢的)’이다. 칼빈도 15년의 인고의 기간이 흘러서야 효과적인 지도력을 얻었는데, 칼빈에 비교할 수 없는 미력한 우리는 도대체 얼마를 참아야할까?

목회에서 ‘빨리빨리’를 이루기 위해서 결국 ‘천천히’로 해야 한다. 벽돌을 빼놓고 건축물을 올릴 수 없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없고, 모르는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도 없다. 설교자인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르치거나 행할 수 없다. 조금씩 천천히 자기 이해를 구체화하며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방법뿐으로 생각한다.

 

마치는 말

 

설교자는 자신이 이해한 복음의 내용을 청중에게 전달한다. 설교자는 교회에 주어진 진리를 전달하는 것인데, 수련하는 설교자는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을 따라서 바른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청중의 이해에 대해서 측정해야 다음 설교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가 전하는 설교의 상태를 조절하게 된다.

설교자는 자기가 원하는 내용만을 전하는 것도 아니며, 청중이 원하는 내용만을 전하는 방식도 아닌 오직 복음이 선포되고 수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천천히’라는 수단을 말하고 싶다.

 

교회의 주인께서는 자기 백성을 몸된 교회로 인도하여 양육을 받도록 하였다. 주의 양들이 주의 목자 앞에서, 목사의 입에서 나온 꼴로 양식을 삼는다. 목사의 끊임없는 되새김의 산물이 다시 양들에게 주어져 끊임없는 되새김에서 즐거운 맛과 생명이 나올 것이다.

주께서는 영생의 보고(寶庫)를 교회에 두었으며, 말씀의 직분자인 목사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도록 하셨다. 그 사명을 받은 자와 그 복음을 듣는 자는 모두 복되다.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는 자는 배(倍)나 존경을 받는데(딤전 5:17),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화(禍)가 있을 것이다(약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