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_윤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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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윤영선/ 아동문학가·집사

방향을 돌려야 했다. 오랜만에 모인 형제들의 모임을 접고 언니 집으로 가던 
길을 친정으로 가야 했다. 지금까지 받은 핸드폰 내용 중에서 이렇게 온몸까
지 떨리게 한 적은 없었다. 울음조차 흘릴 수 없고 바쁜 걸음이 나를 자꾸 늪
으로 가라앉게만 했다. 언젠가 꿈에서 열심히 발을 움직여도 제자리였던 그 
힘겨웠던 기억보다 더 아픈 지금 ‘아!’ 외마디 탄식에 9살 아들이 멍했을 
내 눈을 올려다 보았다.

그 옛날 아버지는 김메다 호미 부러먹고 긴 장마 논에서 삽질하다 물살에 삽 
떠내려 보내고 분노해 하셨지만 서툰 농부의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러
셨을까?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백일홍도 심어 놓고 옥수수도 심어 놓
고 부모님 모시고….’ 

대포 한 잔 걸치신 등 너머로 뉘엇뉘엇 해 질 때 듣던 박자 음정 고르지 않
던 아버지의 슬픈 노래였다. 어려서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자주 보았다. 그 
눈물에 젖
은 힘겨웠던 타향살이의 한이 이제야 진하게 전해 오는 것은 왜일
까?

아버지가 계신 곳은 언제나 꽃밭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힘겨워하는 엄마를 잠
시 뒤로 한 채 봄, 여름, 가을 따라 피는 꽃들을 열심히 가꾸셨다. 그 순간만
이 유일한 낙원이었으리라. 아버지가 가꾼 봉숭아 꽃잎을 따 굵은 소금 척척 
이겨넣어 동생이랑 내 손끝에 올려놓아 그 꽃넋이 배이게 하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완전히 아버지를 이해 못하신 건 아니었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대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학문을 익히며 그게 삶의 전부
인 줄 알고 살던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하여 어려움 없이 생활하던 중에 공산
당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재산과 자류를 몰수당하고 1947년 12월 눈보
라가 심하던 밤, 엄마와 부모님을 모시고 시작된 남쪽으로의 이동, 그 가슴
은 이미 칠흑이었고 낯선 고난의 시작이었다.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된다. 화목하려면 나를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한발짝 물러서서 참아야 한다. 무엇보다 형제간의 우애를 
잘 지키는 것이 너희들의 가장 큰 임무야. 언제나 너희 7남매는 서로 돕고 살

아라.’

이것은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가훈이
었다. 그 가훈을 임무로 맡겨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형제들의 정
은 남달라서 타인의 부러움을 받았다.

가만히 내려다 본 손끝에 떨어지는 한 줄기 소나기 눈물은 아버지를 허공에서
도 찾을 수 없어서일까? 지난 7월에 뵈었을 때 자꾸 침대에 누워 주무시던 
게 마음에 걸렸었다.

“이 아이가 네 아이냐, 이 아이가 네 아이냐?’
“아버지는 ‘금도끼가 네 도끼냐, 은동끼가 네 도끼냐?” 하는 동화 속 산신
령 같아요.”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교통 사고로 대수술
을 받은 후에는 동생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
셨는데 엄마 생신이던 7월에 모였을 대는 너무도 분명히 알고 계셨었다. 그
게 마지막이었다. 그 모습이…

대충 짐을 챙겨 달리는 고속도로는 아득히 멀고 더디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달려오는 길은 하얀 띠로 놓여 있는 듯 했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어
두워 차라리 나았다. 운전하던 남편은 이따금 손을 잡아주기도 하여 나는 이
써 
태연하려 했다.

집 앞마당에 들어서자 산장같이 조용하던 집은 낯선 향이 온 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두런두런 앉아있었다.

평안도민 동산 양지바른 곳, 외아들과 여섯 사위들은 일흔 여덟의 삶을 편안
히 뉘어 드렸다. 엄마와 여섯 딸들 그리고 올캐의 오열은 아버지 살아생전 그
리도 좋아하신 꽃과 새들이 있는 천국으로 가신 것으로 위로 삼았다. 우리 남
매는 화환에서 뽑은 국화꽃을 묘 앞에 세 송이 쫓자 놓고 천근 같은 발길로 
산을 내려왔다.

3일 내내 장대비가 퍼부었다. 집을 빙- 둘러 가꾼 꽃밭, 아버지의정성을 먹
고 자라던 채송화, 봉숭아, 야생 난, 과꽃, 해바라기, 우물가의 포도넝쿨들까
지 아버지 손길이 그리운지 빗물에 눈물 감추며 울고 있었다.

빗물은 꽃밭에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과 추억을 얄궂게 자꾸 자꾸만 씻어내고 
있었다.

“엄마! 저 꽃밭 내년에 내가 와서 일굴게요.”
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꽃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언제까지라
도 그렇게 계실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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