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_윤영선

0
17

꽃밭 

윤영선/ 아동문학가·집사

방향을 돌려야 했다. 오랜만에 모인 형제들의 모임을 접고 언니 집으로 가던 
길을 친정으로 가야 했다. 지금까지 받은 핸드폰 내용 중에서 이렇게 온몸까
지 떨리게 한 적은 없었다. 울음조차 흘릴 수 없고 바쁜 걸음이 나를 자꾸 늪
으로 가라앉게만 했다. 언젠가 꿈에서 열심히 발을 움직여도 제자리였던 그 
힘겨웠던 기억보다 더 아픈 지금 ‘아!’ 외마디 탄식에 9살 아들이 멍했을 
내 눈을 올려다 보았다.

그 옛날 아버지는 김메다 호미 부러먹고 긴 장마 논에서 삽질하다 물살에 삽 
떠내려 보내고 분노해 하셨지만 서툰 농부의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러
셨을까?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백일홍도 심어 놓고 옥수수도 심어 놓
고 부모님 모시고….’ 

대포 한 잔 걸치신 등 너머로 뉘엇뉘엇 해 질 때 듣던 박자 음정 고르지 않
던 아버지의 슬픈 노래였다. 어려서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자주 보았다. 그 
눈물에 젖
은 힘겨웠던 타향살이의 한이 이제야 진하게 전해 오는 것은 왜일
까?

아버지가 계신 곳은 언제나 꽃밭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힘겨워하는 엄마를 잠
시 뒤로 한 채 봄, 여름, 가을 따라 피는 꽃들을 열심히 가꾸셨다. 그 순간만
이 유일한 낙원이었으리라. 아버지가 가꾼 봉숭아 꽃잎을 따 굵은 소금 척척 
이겨넣어 동생이랑 내 손끝에 올려놓아 그 꽃넋이 배이게 하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완전히 아버지를 이해 못하신 건 아니었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대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학문을 익히며 그게 삶의 전부
인 줄 알고 살던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하여 어려움 없이 생활하던 중에 공산
당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재산과 자류를 몰수당하고 1947년 12월 눈보
라가 심하던 밤, 엄마와 부모님을 모시고 시작된 남쪽으로의 이동, 그 가슴
은 이미 칠흑이었고 낯선 고난의 시작이었다.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된다. 화목하려면 나를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한발짝 물러서서 참아야 한다. 무엇보다 형제간의 우애를 
잘 지키는 것이 너희들의 가장 큰 임무야. 언제나 너희 7남매는 서로 돕고 살

아라.’

이것은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가훈이
었다. 그 가훈을 임무로 맡겨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형제들의 정
은 남달라서 타인의 부러움을 받았다.

가만히 내려다 본 손끝에 떨어지는 한 줄기 소나기 눈물은 아버지를 허공에서
도 찾을 수 없어서일까? 지난 7월에 뵈었을 때 자꾸 침대에 누워 주무시던 
게 마음에 걸렸었다.

“이 아이가 네 아이냐, 이 아이가 네 아이냐?’
“아버지는 ‘금도끼가 네 도끼냐, 은동끼가 네 도끼냐?” 하는 동화 속 산신
령 같아요.”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교통 사고로 대수술
을 받은 후에는 동생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
셨는데 엄마 생신이던 7월에 모였을 대는 너무도 분명히 알고 계셨었다. 그
게 마지막이었다. 그 모습이…

대충 짐을 챙겨 달리는 고속도로는 아득히 멀고 더디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달려오는 길은 하얀 띠로 놓여 있는 듯 했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어
두워 차라리 나았다. 운전하던 남편은 이따금 손을 잡아주기도 하여 나는 이
써 
태연하려 했다.

집 앞마당에 들어서자 산장같이 조용하던 집은 낯선 향이 온 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두런두런 앉아있었다.

평안도민 동산 양지바른 곳, 외아들과 여섯 사위들은 일흔 여덟의 삶을 편안
히 뉘어 드렸다. 엄마와 여섯 딸들 그리고 올캐의 오열은 아버지 살아생전 그
리도 좋아하신 꽃과 새들이 있는 천국으로 가신 것으로 위로 삼았다. 우리 남
매는 화환에서 뽑은 국화꽃을 묘 앞에 세 송이 쫓자 놓고 천근 같은 발길로 
산을 내려왔다.

3일 내내 장대비가 퍼부었다. 집을 빙- 둘러 가꾼 꽃밭, 아버지의정성을 먹
고 자라던 채송화, 봉숭아, 야생 난, 과꽃, 해바라기, 우물가의 포도넝쿨들까
지 아버지 손길이 그리운지 빗물에 눈물 감추며 울고 있었다.

빗물은 꽃밭에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과 추억을 얄궂게 자꾸 자꾸만 씻어내고 
있었다.

“엄마! 저 꽃밭 내년에 내가 와서 일굴게요.”
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꽃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언제까지라
도 그렇게 계실 것처럼….

이전 기사이왕호의 글이 있는 사진
다음 기사태우를 도와주세요
기독교개혁신보
기독교개혁신보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의 기관지로서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란 3대 개혁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본사는 한국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신문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