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제라블, 나는 누구인가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자신의 실존에서 발견하고 잉태시킨 삶의 확인은 용서와 정의와 사랑”
굶주린 조카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빵 한 덩이 훔친 죄로 5년형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수차 탈옥을 감행하다 형기가 늘어 19년 수형 생활로 끝은 난다. 하지만 보호 관찰 대상자로서의 가석방일 뿐이다. 정권 유지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정치범으로 단죄하고 형장의 이슬로 보낸 우리의 현대사는 또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모두 믿거나 말거나 할 이야기로다.
이 비참한 존재가 거듭 쏟아낸 ‘나는 누구인가’라는 깊은 외마디는 영화 전체를 통해 계속 확인되어 나간다. 그는 아무도 자신에게 베풀지 아니한 손 대접을 받고서도 도둑질로 그 은혜를 되갚는다. 그는 오로지 빵에만 육신을 지탱할 힘이 있다고 믿었을 따름이리라. 물질 숭배는 이런 식으로도 나타나겠다. 해괴한 것은 다 마찬가지다. 이러했던 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거칠게 내쉴 수밖에 없게 한 그 용서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한 성직자 안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빵처럼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따스한 음식의 형태로 나타났고,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따스한 말의 형태로 그를 후비고 들어왔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물질만이 아님을 배운다.
이 신비한 접촉을 통해 그의 생명의 에너지는 사회 구조 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그 단단한 구조를 녹여내고 소망의 빛으로 변한다. 생명은 어두움의 사회적 논리 곧 구조악을 뚫고 들어가 소망의 빛을 여기저기에 조용히 비춘다. 타인에게 돌아가는 시혜는 한 인간의 삶에서 분출하는 생명의 에너지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이처럼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정의의 문제도 절절히 느낀다. 그가 어느 수도원에서 가석방 확인서를 찢어 날려 보내고 새 출발을 시작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밖에 없는 도망자 신세일 뿐이다. 한 존재 안에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삶은 새로 변했어도 그 자신을 늘 따라다니는 가석방이라는 실정법상의 신원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자베르의 끈질긴 추적으로 그는 위기에 몰린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사람이 붙잡혀 그 올가미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도 맞이한다. 무고하게 그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을 대신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이때 그는 그 무고한 자가 결코 자신일 수는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끝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또 다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울부짖는다. 아무리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어도 그는 보호 관찰 대상자일 뿐이다. 이처럼 이 땅의 형법상의 정의는 그에게 차갑고 두려운 것이었다.
노년에 이른 그는 은둔자로 살아간다. 하루는 거리에 나왔다가 공화파를 지지하는 열혈 청년 마리우스에게 코제트가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긴 사실을 뒤늦게 안다. 그들의 열렬한 사랑이 외로이 살아가는 자신에게서 코제트를 빼앗아갈 참이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은둔자로 살아가는 장발장에게는 코제트가 유일한 위로요 사랑의 대상이요 또 아끼는 자식이 아닐 수 없다. 코제트가 혁명가요 이상주의자인 마리우스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로서는 근심이 아닐 수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보아 온 우리 시대의 부모라면 누가 화염병 들고 앞장서서 거리로 나가는 내 자식을 막지 않겠는가. 어느 부모가 그 같은 청년에게 마음 빼앗긴 내 애지중지하는 딸의 불꽃같은 사랑을 염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장발장은 그런 모든 감정은 마음에 감추고서 조용히 마리우스 편에 서서 싸운다. 이길 수 없는 혁명이었다. 장발장은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온갖 고생하며 간신히 구출해 내어 코제트의 곁에 안겨 준다. 그리고는 조용히 두 사람에게서 물러선다. 이처럼 깊은 사랑이란 자신을 내어주고 비우는 것이리라.
‘나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하던 장발장, 그가 자신의 실존에서 발견하고 잉태시킨 삶의 뚜렷한 확인은 무엇이었을까. 용서와 정의와 사랑이었으리라.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의 합창인 ‘Tomorrow Comes’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