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수학화 함, 그 유익성과 위험성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구원의 계시는 수학적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아”
14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가 그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익명으로 출간한 그의 논문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제자격인 케플러는 천문학 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자연 과학자 갈릴레오가 고전 역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시대에 이르러 자연 과학은 하나의 이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자연을 수학화 함이다.
갈릴레오 이후에 자연 과학은 자연을 수학함이라는 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향은 후대에 계몽주의 철학이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이삭 뉴튼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저서에서 더욱 철저하게 자연을 수학화 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세속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은 수학적 이성을 절대시하는 이론을 개진하였다. 그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그는 존재의 근거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두었다. 이는 계시가 만물의 존재 근거라고 제시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들은 그 이후에 칸트에 의해 저작된 <순수 이성 비판>에서 수학적 이성만이 진리를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는 도그마로 나아간다. 그 이후 인류는 수학으로 해석이 되는 자연만을 오로지 인간이 제대로 인식 할 수 있는 자연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자연 과학의 이념은 계시가 위험하다 경고하는 영역에까지 부단히 실험과 증명을 통해 해쳐왔다.
그 결과 너무나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미신으로 간주 되었던 것들의 실체가 수학 앞에 드러났다. 거짓 종교들이 드러났다. 자연 과학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자연 과학의 이념으로 사라져 버린 높은 가치들로 인해서 인류는 오히려 정신문명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자연 과학의 발달은 인문 과학의 퇴조로 이어지고 결국 인문 과학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현대 시대는 과학자 중에서 시를 음미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학자가 거의 없다. 시를 통해서 자신의 감성을 돌이켜 볼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 그래서 시는 겨우 동시를 통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거나 여인네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인문 과학의 몰락은 철학에서도 겨우 언어 분석이 철학의 마지막 과제라고 주장하며 분석 철학이 발달하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신학 분야이다. 18세기 이후에 발생한 현대 신학이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계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성서 고등 비평학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인문 과학 전 분야가 몰락했다. 18세기 이후에 학문은 자연 과학의 구조로 발달하였다. 자연 과학이 철학의 범주를 결정하고 그 철학이 신학의 범주를 결정한다. 양자역학이 발달하자 포스트모던 철학이 발달하고 그에 맞추어서 포스트모던 신학이 발달하고 있다. 모든 학문이 자연 과학의 이념에 충실하다.
이제 왜 자연을 수학화 하는 이념이 한계가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자연이 수학 보다 크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루트 2를 풀면 1.414….로 불규칙하게 풀리게 되어 있다. 이것을 비순환 소수라고 한다. 이는 인류가 영원히 수학으로 루트 2를 완전하게 풀 수 없다는 것을 자증하는 것이다.
수학은 그 자체가 신비주의다. 고대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신비주의자였다. 현대 문명이 자연을 수학화 하면 할수록 점차적으로 진리로 부터 멀어진다.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는 자연보다 크시다. 여기에 자연을 뛰어 넘는 계시의 자리가 있다.
자연 과학의 발달 이후에 발생한 현대 신학이 얼마나 수학에 영향아래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구주의 말씀은 수학적 이성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계시는 시간과 인간의 언어를 뛰어 넘어야 해석 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해석해야 할 것이 구주의 계시다. 얄팍한 현대 신학으로 역사를 뛰어 넘어서 계시된 구주의 말씀을 해석할 수 없다. 참된 신자는 그 하나님 앞에 잠잠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17세기 대영제국 장로교 퓨리탄들이 그립다. 그 거룩한 성자들을 만나고 싶다. 정통 교회는 17세기 이전 개혁 신학으로 돌아가고 그로부터 사도의 디다케로 돌아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