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에너지와 성도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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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와 성도의 책임

 

< 김영규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높은 이상 잃지 않아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나 한 민족 혹은 어떤 지역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삶으로 살아야 하고 그 시작과 목적에 있어서도 우주의 시작과 끝의 목적에 합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 주변의 조그만 질서도 거기에 맞게 해석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그 질서가 발현되는 현실로서 우리의 삶이 있고, 그 삶의 실체인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형상에 따라 자신의 발현 내용을 점검하고, 거기에 목표로 두고 있는 품격에 맞는 현실을 삶을 통해서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상이 지금 직면하는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 좀 더 좁혀 보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에 들게 마련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부터 눈을 즐겁게 하는 일 등 너무 많은 것으로 적응하려는 습관이 결국 그 이상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시험이 들기 쉬운 것이다.

 

더구나 일반사회나 속해 있는 국가 공동체의 보이지 않은 공동의 힘과 법체계가 그런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 종종 당황하게 되나 용기를 가지고 그런 이상을 선택하고자 할 때도 더구나 이런 저런 고난이 뒤따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혁신적 이해에도 비슷한 고난이 뒤따른다면, 높은 이상으로 인한 고난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순수한 물뿐만 아니라 어떤 물이든 물을 연료로 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에 대한 발명이 공개된 바 있다. 그 기술은 특정한 금속판들을 음극과 양극으로 사용할 때, 물분자의 수소가 전자를 빼앗기고 빠른 프로톤 널뛰기(proton hopping) 현상이 일어나 급하게 물의 pH 변화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이다. 특별히 물분자들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Å이하)이 있는 폴리머들을 겹쳐 프로톤 펌핑(proton pumping)에 의한 전류의 생산성을 높이는 발명품이다.

 

더구나 이 기술을 이용하면 그 전에 제1 전지나 제2 전지에 사용된 전해질이 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연료로 사용이 되어 높은 전류 생산의 원료로 사용될 수 있고 소금과 같은 고체까지도 소금물보다 더 많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기술은 지금까지 연료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되었던 많은 물질 상태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연료로 사용될 수 있는 참으로 응용이 무한한 기술이다.

 

지난 해(2012년) 여름 그 기술에 대한 공개프로그램에서 그런 물 연료 전지로 어떻게 모터가 돌아갈 수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체험해 보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과 MIT의 연구팀이 그 기술을 이용하여 공기의 습기에 쉽게 휠 수 있고 전기도 생산할 수 있는 필름을 개발하여 Science 잡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이 기술이 더 많이 이용될 수 있는 분야는 의학 분야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세포들 안에 있는 프로톤 펌핑 채널, 나트륨 이온 펌핑 채널, 칼륨이온이나 칼슘이온 펌핑 채널 등 많은 특별한 채널들을 활성화시켜 신체의 다양한 치료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 임상 실험의 경우, 이 기술을 이용하여 가려움증, 통증, 감기, 무좀 치료 등의 다양한 치료효과도 확인이 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기술은 또한 효소 없이 흔한 셀롤로오스들을 글루코스로 분해하여 바이오 연료를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존 전기화학 에너지 기술에 있어서 환원과 산화 반응에 대한 이해나 전해질에 대한 이론들이 큰 벽이 되어 그런 기술이 인정이 되지 못하고 그런 혁신기술이 폐기 처리될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특허청의 심사관들의 심사에 있어서 기존의 알려지지 않은 기술에 대한 심사의 경우 그들의 독립성과 기술적 지식이 장점이 되기보다는 약점이 된다는 점이다. 더 큰 이유는 대기업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의 기술 경쟁 혹은 언론들의 이익 챙기기가 그런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나 권리취득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예가 그렇게 많이 지원하기를 원하는 국가 과학기술이나 미래 과학에 있어서 큰 위기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높은 기술도 폐기처분될 정도로 그렇게 경쟁적인 고소득 세속 사회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높은 이상을 잃지 않고 그 고유한 행복 조건들을 향유하기 위해서 적어도 독립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몇 가지 구조적 삶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첫째로 에너지의 자급자족이나 엥겔계수를 높이는 생산활동 영역들의 자급화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자율적 노동은행제도를 도입하여 실질적인 소득이나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다. 셋째로 생산활동이나 주거생활에 필연적인 시설들이나 장비 및 기구들의 공동화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넷째로 개인의 생산활동의 만능화와 전문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틀을 깨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요구들이 잘 충족이 되어 쉬는 것도 노동이고 노는 것도 노동이 되는 희년 제도의 정신이 잘 구현이 되는 공동체의 운영도 궁극적 행복지수를 높일 수는 없다.

 

오히려 고난이나 죽음이 수단이 되어 얻는 행복지수가 그런 행복지수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만 하나님이 모든 행복의 시작과 조건 및 종결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