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설교
< 김성주 목사, 언약교회 >
“목사는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만능 엔터네이너가 아니다”
설교는 교회공동체를 향해 하나님께서 은사를 통해 세우신 설교자를 매개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원들에게 전달하는 계시적(啓示的) 행위이다. 따라서 설교행위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본문을 하나님의 심정과 본의(本意)를 좇아 밝히 해명하는 것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할 줄 안다.
본문을 통해 계시된 말씀의 본의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편의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이 제아무리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쳤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작위적 행위가 성립함으로써 곧 불법과 불복종으로 판정된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지적이다(마 7:21-23; 롬 10:2-3).
이런 이유로 설교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영광스럽고 신령한 작업인 반면, 교회원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바르게 세우는 일’에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두려운 작업이기도 하다(엡 4:11-12).
한편 교회는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표상(表象)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라는 표상(딤전 3:15)도 그 중 하나이다. 이는 교회란 모름지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져, 계시된 말씀을 생명의 원천으로 삼고 자라가야 함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오직 밝히 해명된 진리의 말씀만을 의존해 이것을 먹고 자라가는 살아있는 천상적 생명공동체란 지적이다.
때문에 말씀이 계시의 본의를 좇아서 정당하게 선포되고 합당하게 가르쳐지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할 때 거기에 유사(類似) 및 사이비 기독교의 모습은 존재할망정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회의 존립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과 바른 설교와의 관련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교회공동체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지상적 임재방식의 유일한 기관으로 세우시기 위해 이토록 중요한 말씀선포의 설교권을 특별히 목사에게 위임하신 것이다(엡 4:11-13).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수종자로서 위임된 설교자인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줄 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본의와 그 깊으신 뜻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함으로써 이 사명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말씀이 하나님의 본의에 합치될 때만이 설교로서의 본래적인 의미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할 때 설교는 단지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기독교적 만담에 불과할 수 있다. 이처럼 강단이 자칫 무대로 인식되어질 때 목회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수종자의 신분이 아니다. 다만 청중을 시청각적으로 즐겁게 해 주는 전문 연기자로 전락될 수도 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성도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일과, 하나님을 바르고 온전하게 알게 하는 신지식과 신관에 깊이 접촉되게 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을 이기는 천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데 최선으로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목사의 핵심적인 본분은 말씀의 본의적인 해석과 해명 그리고 선포에 있다 하겠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말씀의 종 된 수종자로서 말이다.
목사는 결코 청중을 울리고 웃게 하는 세속적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그런 일은 사람의 영광과 찬사를 받을지언정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기도취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고도의 연기일 뿐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수종자인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