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유익순 목사·제주성도교회
무정란을 아십니까? 무정란은 말 그대로 수정이 안 되어 생명이 없는 알입니
다. 껍질도 있고 흰자도 있고 노른자위도 있어서 먹는 데는 차이가 없으나,
생명의 부활로 병아리가 되어 태어나는 유정란에 비하면 기껏 소금 튀는 프
라이팬 위에 올려 져 사람에게 먹힐 뿐입니다.
실속없이 겉모양만 같은 무정란
스물 여섯 젊은 나이에 목회수업도 재대로 받지 못한 채 강원도 정선의 한
시골교회의 강단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시골이라고는 해도 성도들이 적잖게
출석하는 오래 된 교회였습니다. 순수하기만 했던 시골교회 성도들은 서툰
전도사를 잘도 섬겼습니다. 그 후 여러 곳에서 개척을 하였고 많은 성도와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다고 했지만 돌이켜 보면 아쉬
움이 많이 남는 목회의 길이었습니다.
건축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많은 시간을 노동하는데 썼으니 설교가 소홀했겠
지요. 늘 가난했던 삶도 목회
사역에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러나 정작 아쉬운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더 뜨거운 체험
적 신앙을 가지도록 지도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성령을 사모
하도록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가서 거기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하나 같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
하였노라”고 했습니다(행 19:1). 예루살렘에서는 성령강림 사건이 이미 있
었으나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당연한 말이겠지요? 우
리가 그 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성도들이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시작하여 고상한 인격으로 변해 간다면 목회자라면 누
구나 다 보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에 열심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
에 대해서도 지극정성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때가 되면 주일을 성수
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전도’나 ‘선교’ 같은 차원 높은 신앙인으
로 자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혹은 ‘집사’로 혹은 ‘장로’로 세워지겠지
요?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만일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혹 무정
란이 아닐는지요.
목회자로서 요즘은 정체성의 심한 혼란을 느낍니다. 교단이 개 교회에 미치
는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고, 교회가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
다. 그러다 보니 이 험준한(?) 목회 현장에서 발돋움하기 위해 무슨 특성화
교회를 하겠다며 목회자들이 저마다 난리들입니다.
개성 있는 목회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니라
고 봅니다. 무슨 다단계 사업도 아닌데 성도들을 피라미드 같은 조직 속에
두고, 열린 예배를 한다며 주변 교회가 시험에 들기만 하면 삼킬 준비를 하
고 큰 입을 벌리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성령이 있기나 한 건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교회들이 정체성을 상실 해 가고 있는 사이 최근 들어 성령운동이 강
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는 교회들도 있습
니다. 아직 예배가 시작일 뿐인데도 찬송 몇 장에 벌써 감동에 젖어 드는 성
도들, 성경을 강해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신학을 설교하는 것도 아닌데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긴장한 모습으로 ‘아멘’을
소리치는 성도들! 우
리에게는 없는 것이 거기에는 있어서일까 그들의 사역에 자꾸만 눈길이 갑니
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느 누구는 안 된다며 선만 긋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울타리를 뛰어 넘어 살겠다고 내 달리는 성도들을 무슨 수로
잡을 것이며, 교단의 벽을 넘어 성령을 배우겠다고 배회하는 목회자들을 무
어라 탓하겠습니까?
성령 찾아다니는 사람들 많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면 저들에게서 ‘성령’을 훔쳐서라
도 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더 메마르기 전에 우리도 저들처럼 은혜의 강물
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