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장로교 뿌리부터 연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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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뿌리부터 연구하자

김영규 목사
·뉴욕학술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한국교회가 지금 1907년 평양 대 부흥을 기념하기를 원한다면, 세계교회 앞
에 어거스틴이 도달하지 못하고 루터나 칼빈, 어떤 개혁교회도 이루지 못한 
일을 발견하고 그런 일을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기를 바란다. 

겉으로만 화려한 부흥과 개혁

부끄럽게도 개혁신학을 내세우는 곳에 그 역사적 자료들을 모아 기념하는 기
념관 하나도 없고 원 자료들을 모으는 일도 해 본 적이 없다. 한국장로교회
는 아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목회자들의 자료들조차도 모으려
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너무 슬
픈 일이다. 
세계교회사에 있어서 어떤 지역이나 시대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한다는 것
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내리신 선물이다. 지금의 서방교회나 동방교회는 성
경에서 보여준 순수한 교회로부터 떠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교황청
과 영국 성공회 사이의 검은 
정치적 싸움, 유대 테러주의자들과 이슬람 테러
주의자들 사이의 링 위에서 칼싸움, 기독교 근본주의와 다아윈주의 사이의 
싸움도 아닌 싸움을 주선하고 누가 판정패를 당하였는지를 구경하거나 그 싸
움들에 휘말러 들어가면서 정작 해야 할 시대적 과업을 하지 못해도 똑같은 
실패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록펠러 가문, 카네기 가문, 포드 가문이 십일조를 잘 내고 모건 가문이 헌금
을 많이 냈다고 해서 그렇게 부유해진 교회가 그들의 경제적 착취를 비판 없
이 지나간 것이 미국교회의 몰락의 보이지 않은 모습이라면, 그것을 먼 산 
보듯이 미국의 예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지금 속성에 있어
서 가감이 없고 구원에 있어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 외에 어떤 것도 사려하
지 않은 그 하나님을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기독교가 역사 앞에 이미 이기는 싸움을 하면서도 너무 초라하게 시대의 흐
름이나 정신과 같은 허무한 가상현실들에 갇혀 자신의 진정한 일을 하지 못
하고 시간만을 흘러보내고 있다면, 어떻게 성경의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계 안의 인종적, 정치적, 경제적 갈등 등 사
람들 사이에 수많은 갈등
들을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었지만 모세에게 나타난 그 하
나님 앞에 다 묻혀 버릴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우선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
다. 
모세를 부르신 그 하나님이 평양의 대 부흥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부르신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시라면, 진정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목표를 두지 
않고 그 부흥 자체나 그 시대에 대한 반응, 그 백성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
는 것은 교회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 행위들이다. 목회자들
은 목회자들대로, 교회 신자들은 교회 신자들대로 지금 그런 하나님 앞에 어
떤 자로 서 있어야 할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자신들을 위해서만 잔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물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숨기기를 원치 않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그의 자손들이 여
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강대한 
나라가 되어 세계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내용(창 18:17-19)이 바로 같
은 길을 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 속에 그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는 누구나 그런 뜻을 가진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
은 것이요 이
스라엘 안에 출애굽의 기적 역사와 그들의 가나안의 모든 생활이란 그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그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양식을 먹는 일을 위해 아담이 창조된 이래 인류는 그 길을 가는데 실
패하였고 그리고 여전히 같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아브라함이래 이스
라엘 가운데 실패한 증거들만이 인류 앞에 남아 있는데도, 그런 역사의 끝까
지 선포한 같은 소리를 교회가 아직도 듣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에게 
왜 세계가 있고 생명과 복이 있으며 사망과 악이 있는지를 아직도 교회가 모
르고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회개이고 부흥인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지극히 큰 상급은 세계교회도 아니고 
민족의 교회도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다.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
로 취득하였다면 모든 문명과 문화, 역사들은 그 역할을 다 한 것이고 지나
가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의 땅과 경제적 가치, 세계 앞에 보이고자 하는 모
든 가치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 그리스도께서 지금 땅의 성도들에
게 바라는 것은 
그 같은 하나님과 친히 모든 역사를 통해서 행하신 그 말씀 앞에 자신이 친
히 아담을 대표하여 아담이래 모두 실패한 인류에게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
의 형상과 그 모든 속성들을 모든 피조성으로부터 쟁취해야 할 승리의 취득 
내용들을 은택으로 받는 것이다. 그런 역사들만을 세계와 공유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을 보내고 있고 그들을 보내는 땅에도 여전히 설교자들이 있으며 성
도들이 있다. 보내는 곳은 망하고 있는데 보낸 곳은 새롭게 되는 그런 것은 
없다. 버릴 것은 어디에서나 똑같다. 
우주의 창조란 짧은 기적이지만 그 후의 역사들이나 섭리들은 긴 시간의 기
적일 뿐이다. 우주를 짧은 시간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면 그 창조 이후 같
은 말씀을 긴 시간 동안 이루고 있고 지키고 계실 뿐이다. 지금도 인간의 평
범한 양식인 하나님의 뜻은 창조를 유래케 한 같은 말씀보다 창조 이후의 목
적과 종결에 관한 하나님의 깊은 뜻과 말씀으로 선포된 것들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긴 역사도 말씀 창조의 연속

실로 창조의 신비에 대해서 인류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라면 우리에
게 주어진 양식으로서 그 
말씀들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이겠는가? 세계교회
가 지나간 역사를 다시 거꾸로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그런 뜻을 나타내신 그 
하나님을 지금 다시 발견하고 그 하나님에게로만 돌아가야 할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