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
이재헌 목사_대구 동흥교회
한 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얼음 냉수 한 잔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계
절이다. 무더위를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소극적인 모습으로 더위로부터
피해보는 피서(避暑)의 길도 있겠지만 반대로 적극적으로 목양의 현장에서
최선의 열정을 다하는 투서(鬪暑?)의 자세도 흥미 있는 방법이라고 보여 진
다.
더위를 이기는 이열치열
이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 시원함을 드리는 길이요 주께서 기뻐하
실 때에 우리 또한 동일한 기쁨으로 시원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
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고 하였다.
더위와 노곤함에 지쳐 힘을 잃어갈 때면 목회 초년병 시절에 경험했던 한 가
지 일이 생각나면서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져난다. 그 기억은 이내 미세
한 자극이 되어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도 한다.
전형적인 시골 교회를 섬기며 담임 목회자의 길을 처음 내딛기 시작한 패기
와 열정으로 무장한 때였다. 무더운 한 여름 날 허리를 잘 펴지도 못할 만
큼 연로하시지만 따뜻한 정과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기를 싫어하시는
어떤 집사님의 집에 심방을 한 적이 있다. 평생 일과 함께 살아오신 분들인
지라 맹위를 떨치는 무더위도 그 분들의 일손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안쓰
럽고 염려되는 마음을 안고 잠깐이나마 휴식의 시간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심방한 것이다 .
황송할 만큼 반갑게 어린 목회자를 맞이하면서 평소엔 전기세가 무서워 마음
대로 돌리지도 못하던 낡은 선풍기를 아들 같은 목회자의 면전에 세워두고
힘차게 돌리신다. 이에 모자라기라도 하듯 손부채가 연신 등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허나 정작 집사님은 연방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면서도 눈가에 가득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서 “난 괜찮아요” 한다. 집사님의 틀니 사이로 새어나는 흥
분된 말씀에 나는 송구스런 미소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화답일 뿐이었
다.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서 예배를 인도하고 났는데 예배가 마치기가 무
섭게 집
사님은 굽은 허리를 붙잡으시고서는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분주한 손길을 움
직이셨다.
“목사님 오시면 한 번 대접해 드리려고 아껴 놓은 건데 금방 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셔.”
거의 명령에 가까운 강권으로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시더니 이내 골이 깊
게 패인 주름 사이로 땀이 내를 이룬다.
언제부터 준비하셨는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콩 국물에 국수를 삶아서 조그
만 얼음까지 띄워서는 땀과 웃음으로 가득한 얼굴에 수줍음의 주름까지 지으
시며 상을 차려 내셨다. 한 여름의 더위를 몰아내는 시원한 콩국수에 포근
한 어머니의 정을 느끼면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를 마치고서 막 젓
가락을 드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갈등으로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
다.
눈앞에 놓인 국수 그릇 안에는 정성으로 갈아 만든 콩 국물에 소담히 담긴
하얀 국수뿐 아니라 거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부유물(?)이 보였던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흘러 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하얀 국수와 거
의 구별이 되지 않는 벌레들이 당당하게 콩국수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
이 아닌가?
연로하신 관계
로 시력이 좋지 않으신 집사님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으나 상
대적으로 밝은 시력을 가진 내게는 너무나도 선명하게도 유유한 그 자태가
보였다.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할머니 집사님의 연이은 권고에 도저히 젓가
락을 놓을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면 집사님이 당하실 당혹
감을 생각하니 도저히 사실을 말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길게 숨을 들이시면
서 만물을 만드신 여호와의 손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간절한 기도(?)를 마
음 속 깊이 드리며 두 눈을 꾹 눌러 감고서는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주의 종을 대접한 흡족한 마음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미소를 지으시는 집사
님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이전에 맛보지 못한 시원함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집사님의 마음에 가득했을 그 시원함과 더불어 작
은 한 고비를 넘어선 내 자신의 뿌듯한 모습에 자위를 하면서 누려보는 시원
함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가슴 가득 시원함 넘쳐
그 집사님이 주님 앞에 부르심을 받으시는 날 우리 주님의 마음도 무더위에
얼음 냉수를 마시듯 시원하셨으리라 믿는다. 또 다른
시원함을 기대하며 이
여름도 목양의 기쁨에 땀 흘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