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울 할머니
이은상 목사/동락교회
팔순이 넘으신, 그래서 기억력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 가끔 전화를 드리면
녹음기를 듣는 것처럼 항상 세 마디만 하십니다. “어디냐? 언제 올래! 며느
리와 애들도 같이 오거라!!!” 애들은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식과 며느리는 목
회한다는 핑계로 “오늘은 못 갑니다”라고 아버님과의 짧은 통화는 끝을 맺습
니다.
자식의 불효는 손자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나봅니다. 가뭄에 콩 나듯 자
녀도리를 한답시고 모처럼 아이들과 부모님을 찾아뵐 때면 아이들은 잽싸게
싱거운 인사만 드리고 컴퓨터로 냅다 달려갑니다. 아이들은 노인냄새를 피자
냄새보다 더 잘 맡나봅니다. 그래서 손자녀석 한 번 안아보고 싶은 할머니
의 소원이 그만 무너집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피하는 녀석이 쑥스러운 줄만
알고 계십니다. 이 모두가 다 아들이 손자에게 물려준 할머니, 할아버지께
대한 불경건의 열매들입니다.
맛난 음식이 생기면 몰래 감췄다 슬그머니 꺼내주시고
, 고쟁이 속의 꾸겨진
지폐를 넉넉한 가슴으로 손안에 쥐어주시는 따뜻한 이름, 울할머니! 자식에
게 필요한 것이라면 온갖 잡동사니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버스를 몇 번씩 갈아
타서라도 올라오시는 할머니! 자식을 위해서라면 몸도 마음도 늘 청춘이십니
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큰 피해보는 것처
럼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힘이 없고 돈 없는 노인들을 마치 짐스러운 존재처
럼 대하는 풍조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똥오줌 분간 못하시거나 식사
를 드시고도 곧바로 밥투정을 하시는 노망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일은
왠지 시대흐름에 뒤 처진 듯하고 그래서 자녀들은 서로 피할 길만 찾습니
다.
따라서 이 시대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서 특정 달 특정 날만 아니라
무시로 생각해야한다고 봅니다. 이 주제가 엄청나게 중요한 이유는 불효는
불경건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중의 하나라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28-30, 딤후3:2). 그러므로 현 시대 상황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은 이 세상과 다른 경건을 보여줄 독특한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효를
힘껏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효의 실천 중 고민도 많습니다. 그것은 불합리하다 생각이 드는 경우
입니다. 예컨대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성품이 괴팍하거나, 뒷감당하
기 어려운 질병 중에 있거나, 혹은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 등의 경우입
니다. 입장에 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경우 효의 실천이 결코 쉬운 일
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어떨까요? 성경은 어떤 경우라도 순종하
라고 합니다(엡6:1-3). 왜냐하면 첫째로 이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옳다는
단어는 태초에 설정된 창조질서의 원리에 합당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녀
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자연질서의 일부이며 삶의 기본적인 법칙중의 하나
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어떤 경우라도 부모를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명령은 약속 있는 명령이라 했습니다. 약속이라는 단어는 심중에
못박아 주고 싶을 만큼,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실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의 실천이 어려운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을 의지하며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죄행을 강요하는 극단
적인 명령이나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명령 등은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
다.
요즈음은 부모 앞에서 거만하고 무례하고 혈기부리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부
모에 대한 무관심과 푸대접이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
도인들은 ‘긴 병에 효자가 나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인식
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인 손자 손녀들에게
까지 효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들이 ‘울엄마’ 라는 의미 깊은 이름을 부르
듯이 우리들의 자녀들도 ‘울할머니’ 라고 부르도록 말입니다.
울엄마 울할머니는 가족 간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끝없는 보살핌의 대상이며
공경의 대상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는 대상임을 가족전체가 몸으로 경험하
기까지 부모공경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