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으로 목회합시다!
이은상목사/ 수원노회 동락교회
예수님은 가끔 우리에게 충격을 주십니다. 상처와 결점을 가진 무리들을 자
상하게 치료하시던 예수께서(마15:29-31) 어느날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
을 반가이 맞아주시기는 커녕 오히려 거친 태도로 대하십니다(눅9:57-62).
마치 ‘올테면 오고 갈테면 가라’는 식의 배짱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
에게 진단질문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추종하는 현대 교회는 과연 어
떤 모습일까요? 아마 예수님의 전자의 모습에는 아주 익숙한 반면 후자의 모
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서 옵쇼, 뭘 드릴갑
쇼’와 같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현대
교회는 이제 후자의 모습을 기피하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 우
리는 예수님의 후자의 모습도 따라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필요를 채워주는 것과 비위를 맞추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
교는 아부꾼이 아니라 봉사단입니다. 봉사는 빵이 절실
히 필요한 자에게 양
식을 선물로 주는 것이고 아부는 배부른 자에게 더욱 탐욕을 부추키는 뇌물
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전도를 한다는 핑계로 교회가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선물공세를 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비위라 보여집니다. 정말 선
물이 필요한 자들은 입주자들이 아니라 평생토록 청약통장도 없이 살아가는
‘절대 빈곤의 0순위자’들입니다. 이웃사랑과 비위를 맞추는 것은 다르다
고 봅니다. 무조건 사랑과 무절제한 감상적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더이
상 교회가 이러한 궁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 문제시되는 것은 필요와 아부를 구분하지 아니하면 복음에 손상을 입히
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잘 팔리지 않아 남
은 떨이를 없애려는 상인의 마음처럼 조급합니다. 심지어 비굴하게까지 보
여 결국 복음의 영광의 빛이 바래지고 있습니다. 바나 리서치그룹의 조지 바
나 박사는 “오늘날의 교회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지적한 대로 이른바 ‘싸구
려 은혜’의 일차적인 수출업자이며 싸구려 은혜는 신앙에 대한 소비자적 접
근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복음은 영광스런
것이며 이 세상
의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이며 진주입니다. 교회는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려는 미련을 다함께 접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할 것은 당당함입니다. 배짱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살얼
음판을 걸어가는 자처럼 스트레스 받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좁은 길로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
오는 법입니다. 교회를 나와주는 사람들이 더 이상 늘어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나와주는 곳이 아니라 죽더라도 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유명한 학원
은 차량운행을 하지 않아도 학생이나 학부모가 군소리 없이 다닙니다. 교회
도 세상의 소리에 꿀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비위를 맞추다보면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짱은 사람을 투
명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만듭니다. 억지로 하거나 척하지 말고 배짱으로
기독교를 전해야 합니다. 물론 주제 넘는 똥배짱을 갖자는 말이 아닙니다.
배짱과 똥배짱은 다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자기
고집만 세우는 것은 배짱이 아니라 ‘똥배짱’입니다. 배짱은 내 맘대로 내
뜻대로가 아니
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교회가 부흥하겠느냐구요? 그렇다면 합신의 태동기를 생각해봅시
다. 그때 학위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짱으로 나왔습니다. 이러한
배짱을 갖게 한 것은 주님을 ‘바로’ 따르겠다는 개혁정신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합신은 지금까지 개혁의 요람으로 건강하고 힘있게 자라왔습니다. 까
짓 것, 안되면 그만이지 뭐, 그래도 주님은 되게 하십니다. 벙어리 삼 년 귀
머거리 삼 년 눈물목회를 접으시고 콩 내라 팥 내라는 세상의 요구에 굽실대
지 마시고 주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배짱
으로 목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