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다르게 기도할 때입니다_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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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르게 기도할 때입니다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동락교회

이야기 하나, 필자의 고향마을에 축산을 하는 신체 건강한 농부가 있었습니
다. 이 사람의 주특기는 힘과 열심 그리고 축산 외에도 동물을 거세하는 기술
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직한 이 농부의 아내가 그만 바람을 피우고 말았습니
다. 화가 난 농부는 소문 끝에 아내와 놀아난 남자를 찾아 나무에 묶어놓고 
간통에 대한 벌로 그 남자를 거세시켰답니다(풍문괴담). 이야기 둘, 평범한 
30대 맞벌이 부부인 혁과 경은 나른한 부부생활에 권태를 느껴 결국 이들 부
부는 성적 불만을 해소하고자 부부끼리 서로 배우자를 바꿔 성관계를 갖는다
는 ‘스와핑’의 유혹을 받아들입니다(영화 ‘클럽 버터플라이’). 

두 이야기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전자는 천민스럽고 무식하며 비논리적고 후
자는 귀족스타일을 풍기고 매우 합리적인 것 같으며 전자에 비해 성에 관한 
고상한 진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엽기적이고 망령된 행동
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 타락상을 보면서 ‘세상에 어찌 이런 일
이?’ 하며 놀라거나 인륜이 무너졌다고 흥분 비판하거나 아니면 ‘性도 사회
의 변천과정 중의 하나이려니’ 하며 수수방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엽기적 사회에 대해서 방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신자의 삶이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은 사회에 대해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들은 현 사회의 성적타락상을 보면서 ‘말세중의 말세다’ 라고 흥분만 할게 
하니라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그 원인을 분석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하면 이러한 타락을 막을 수 있을까?’ 라는 해결책을 밝혀내야 하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스와핑과 같은 성도착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신경전문의들은 스와핑을 노출증, 관음증 등의 심각한 심리적 질병
으로 말하기도 하며 통념과 달리 한 편에서는 음식에도 기호식품이 있듯이 성
에도 개인의 취향이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본능이라는 옹호론을 펼치

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성적 도착을 사단의 속임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은 고린도교회 내에 음행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고전6:9). 이 말은 곧 ‘속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 윤리를 버리고 인간의 쾌락의 권리
만을 주장하도록 하는 사단의 속임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눅17:26-
30). 오늘날도 사단은 동일하게 ‘왜 부부끼리만 성이 가능한 거지?’란 의문
을 던지며 금지된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미혹하고 있으며 이러한 미혹에 빠
진 인류는 타락의 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
회에도 이전에 불의의 인생을 살아왔던 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깨끗하게 살
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9-11절). 

바울의 논리는 불의를 막을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사실을 제공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먼저 경험한 그리스도인
들은 불의에 빠진 이 사회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로 하여
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
다. 

이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임하도록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야말로 사회의 극적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시2:4)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그리고 불신자들의 대거 회심이 
동반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에도 극치가 있는 것처럼 경건에도 극치가 있습니다. 경건의 극치는 하나
님의 선물이 아닌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 ‘그 
분’ 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 부와 귀와 명예만을 추구하지 않았는지
요? 그 결과 스와핑과 같은 타락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탈
의 극치와 부유층과의 함수관계는 우리가 기도할 때임을, 아니 다르게 기도
할 때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다르게 기도할 때입
니다.’

‘저런 저런’ 하면서도 짜릿한 기사나 망측한 이야기들을 즐겨 찾으려는 숨은 
심리까지도 불태울 수 있는 하나님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그
렇지 아니하면 마귀가 오순절을 맞이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