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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곧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음의 의미

출애굽기 14장 10-31절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제26주, 제69-71문 참고)

 

< 황원하 목사, 대구산성교회 >

 

《초대 교회는 아무에게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세례를 베풀기 전에 반드시 교리공부를 시켰다. 기본적인 교리를 알고 문답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세례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수세자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기억하여야 하며, 세례를 집례하는 교회와 목사는 수세자의 상황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

 

 

교회에 나오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세례의 의미를 잘 모르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세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세례를 베푸는 교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다시 제대로 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는 중요한 성례(거룩한 예식)이므로 교회가 신중하게 베풀어야 하고 받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야 한다. 결혼식을 함부로 거행하지 않고 장례식도 중요하게 여기면서 세례 예식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1. 세례의 가치

 

초대 교회는 아무에게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세례를 베풀기 전에 반드시 교리공부를 시켰다. 기본적인 교리를 알고 문답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세례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주후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공인한 후에 모든 국민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면서 세례의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불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렇게나 세례를 베푸는 일은 반드시 자제해야 한다. 세례는 결코 경솔하게 시행되지 않아야 한다.

 

베드로는 세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베드로는 세례가 우리를 ‘구원하는 표’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한다. 이것은 세례가 단지 기념 예식으로 간주될 것이 아니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례는 기독교 전통에서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비로소 신앙의 여정을 시작한다.

 

2. 세례의 유래

 

신약에서 세례는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요한이 세례를 어떻게 도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그가 유대의 정결의식과 쿰란 공동체의 목욕의식을 참고하여 독특한 예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는데, 선지자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요한의 세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특별히 보내심을 받은 사람인데,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더럽고 불결한 것을 씻는 의식으로서 세례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셨으며 직접 받으셨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시행하였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세례를 베푸는 형식은 같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가 메시아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시대를 준비하는 의식이었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이었다. 즉 세례는 수세자를 유형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시킨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례는 예수님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세례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세례는 이미 구약에서 상징적으로 계시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홍해를 건넌 사건이다. 구약에서 물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의미한다. 노아의 홍수는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의로운 자들에 대한 구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일 역시 불의한 이집트 사람들과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편이 되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함으로써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고전 10:1-2).

 

3. 세례의 효력

 

세례의 효력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다(예. 히 12:24; 벧전 1:2; 계 1:5; 슥 13:1; 겔 36:25; 요 1:33; 요 3:5; 고전 6:11; 고전 12:13; 롬 6:4; 골 2:12). 이 구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세례가 은혜의 실질적인 방편인 것을 알게 된다.

 

1)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선언함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다. 이에 따라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더러운 죄를 씻어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례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공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롬 6:3-4).

 

그렇지만 세례와 구원이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았을 수 있으며, 세례를 받았어도 구원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이것은 세례 자체가 어떤 효력을 가지고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실로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보증하고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2) 죄를 깨끗하게 씻어줌

 

세례는 ‘외적인 씻음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내가 몸의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물로 씻는 것처럼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내 영혼의 불결함, 즉 나의 모든 죄악을 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친히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하는데 대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성화시키시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선함을 사모하는 성향이 늘어난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세례는 ‘중생의 씻음’(딛 3:5) 혹은 ‘죄 씻음’(행 22:16)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종류의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를 통하여 우리의 본성이 거룩함과 의로움을 추구하게 된다.

 

3)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이집트 군사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셨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갈라졌던 바닷물은 이집트 군사들이 뒤 따라 건너려 할 때 다시 합쳐져서 이집트 군사들을 멸절시켜 버렸다.

 

결국 홍해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은 다시 왕래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장벽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며, 따라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다. 홍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전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인치시며 우리를 그분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 가운데 보호해 주신다. 이는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겨서 하나님의 정결한 자녀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는 은혜언약의 표와 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세례는 중생과 사죄와 헌신의 표인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보증과 보호의 표식인데,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영원히 지켜진다.

 

4) 지속적인 은혜를 받게 함

 

세례는 은혜의 방편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은 자에게 그분의 은혜를 주신다. 하지만 세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세례를 집례하는 순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세례를 받는 순간에 제공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제공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러나 세례를 통한 은혜가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은혜를 자동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명히 믿음이 우선이며 전제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 11:6).

 

5) 유형교회의 회원으로 가입시킴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고전 12:13). 여기서 ‘한 몸’이란 교회를 뜻한다. 즉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교회를 이룬다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은 세례가 수세자를 유형 교회의 회원으로 엄숙하게 가입시킨다고 명시한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교회로 모여서 교회 안에서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별된 신적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4. 세례의 시행

 

1)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

 

세례를 모독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죄이다. 세례를 아무나 집례해서는 안 된다. 세례는 반드시 합법적으로 소명을 받은 복음의 사역자, 즉 목사가 엄중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만이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은 목사가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목사는 세례를 베풀 자를 잘 분별하여야 한다. 우선 세례를 받을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교리들을 가르쳐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2)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유형 교회에 등록한 회원들로 교회가 정한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한다. 그리고 유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유형 교회의 회원들의 자녀인 생후 24개월 이내의 유아들이어야 한다.

 

세례를 받으려면 신앙을 분명히 고백해야 하는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 한다. 그리고 목사에게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아야 하며 당회가 실시한 문답에서 통과되어야 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임종하기 직전이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에 당회의 결의로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형 교회 밖의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수 없다.

 

3) 물로써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사는 물로써 수세자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여기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물이 구원의 사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가 삼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깊은 연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과 예배와 신뢰와 존귀를 체험하고 향유하게 된다. 따라서 세례를 이와 같이 받는 것은 큰 복이다.

 

4) 침례인가 뿌림인가?

 

세례의 시행 방법에 관해서는 오래되고 지루한 논쟁이 있다. 그것은 수세자를 물에 담그는 침례가 옳으냐 아니면 수세자에게 물을 뿌리는 뿌림이 옳으냐의 논쟁이다. ‘세례를 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밥티조’는 ‘물에 담그다’, ‘빠뜨리다’, ‘적시다’, ‘씻다’, ‘뿌리다’의 의미를 가지는 ‘밥토’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단어 자체를 가지고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방교회에서는 물에 담그는 방식으로 세례가 행해졌고 추운 북쪽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세례가 행해져서 두 방식 모두가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 수록된 세례 이야기를 관찰해 보면 물에 담그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는 있으나 물에 담글 만한 상황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는 강에서 베풀었으므로 물에 담그게 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울이 감옥에서 세례를 베풀거나 집 안에서 세례를 베풀었을 경우에는 분명히 물에 담그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물을 뿌렸다고 보아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침례를 고집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 수세자를 반드시 물에 담글 필요는 없다.

 

5) 그 밖에 알아야 할 것들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수세자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기억하여야 하며, 세례를 집례하는 교회와 목사는 수세자의 상황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 유아 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나중에 장성하여 입교문답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유아의 부모와 집례 교회는 유아 세례 기록을 잘 기록해야 하고 보존해야 한다.

 

세례를 베풀 때 미신적인 도구들, 즉 기름, 소금, 양초, 기타 물건 등과 덕스럽지 않은 세속적인 의식은 결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세례를 시행해야 한다. 사람 외에 짐승이나 여타 피조물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세례를 가증스럽게 만든다.

 

마치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리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6).

 

그러므로 세례는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온전한 복음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