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누가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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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 31일이면, 루터의 95개 조문을 되뇌여 보게 된다. 1517년, 독
일 북쪽, 싹소니 주의 조그만 신흥 교육도시, 빗텐부르그 대학 출입문에 간
단하게 내걸어 놓은 토론 주제가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올 줄은 아무도 상
상하지 못했었다. 라틴어로 쓰여졌던 이 간단한 주제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생각해 볼 숙제로 준 것이었는데, 일주일 안에 전 유럽에 각 나라말로 번
역되어 전파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게 된 것이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역사의 전화점을 만
들어 내었다. 반성직주의와 만인 평등의식을 심화시켰고, 빈곤과 질병과 가
난으로 피폐한 인권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인간이 정치나 종교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그 주체가 되는 변화를 몰고 왔다. 그 변화의 주체는 깨어
있는 신자들이었다.
올해에 다시 루터가 20세기 말을 넘기고 있는 현대 인류사회를 바라보면서
토론의 주제를 내건다면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그가 만일 한국을 위해서
한가지를 제안한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필자는 아
마도 가장 ‘개혁’이
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한국의 정부와 각종 단체에게 이 단어의 의미
를 올바로 쓰라고 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혁’이란 ‘갱신’이란 말이다. 모든 것을 고치되 그 정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본래의 의미와 제도로 바로잡는 것이다. 참된 제도를 위해서 먼
저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깨우치고 바르게 되자는 운동이었다.
루터가 에르푸르트 법과 대학원을 중퇴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 갈
때의 고민이 바로 개혁운동의 개인적 실현이었다.
그러나, ‘개혁’이란 말은 종교적인 색채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
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엄청난 구호들을 내걸고 홍보해 왔다.
그때마다 개혁이란 말이 가장 애용되었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거창한 개혁
과제를 분야별로 선정하고, 이것만은 추진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제 점점 그런 희망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있다. 지금의 정부는
다가올 총선에 대한 전략수립에만도 시간이 모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
서 정권교체 이후에 가졌던 기대심리, 새로운 정당이나, 어떤 기관에게 기
대했던 소망이 서서히 흐려
지고 있다.
지도자에게 걸었던 기대도 역시 신기루에 불과한 것임을 이제는 깨달을 때
가 된 것이 아닐까? 희한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종 문제의 담당자들
은 제쳐두고 오직 최종 해결자로 항상 청와대만을 바라본다.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냄으로서만 사회문제화 되고, 비로소 주무 부서가 움직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하다. 우리가 각
분야에서 주어진 양심과 지성을 활용하여서 가꾸어 나가지 않는다면 수시
로 청와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끝없이 탄원서를 제출해야만 할 것이다.
남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있는 초월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부족하지만 각자 자신들의 지혜와 노력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다
른 나라 사람들이 앞장서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듯이, 자신들의
문제를 당국자들이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 스스로 정화
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우리는 영원토록 개발도상국에 머물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개혁의 병폐를 지적하는 것이 대학입시제도이다. 고칠
때마다 개악한다고 아우성이다. 이번 정부가 추진한 새로운 제
도도 역시
상당한 혼선을 야기하고 있다. 물론, 여지없이 국민들은 당국자만 탓하고
있다. 교육부와 교사들을 탓하는 학무모들은 언제까지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불평세력으로 남을 것인가? 모두 힘을 합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발전된 제도와 훌륭한 인격 교육은 영원히 요원하게 될 것이다.
각종 사회의 현안들도 마찬가지로 각자 해결을 위해서 두 팔을 겉어 부치
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세금을 내는 국민들 스스로 개혁의 주체로서 사
명감과 책임감을 갖지 못한다면, 발전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스포츠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엄청나게 버리고 간 쓰레기더미는 누가 개혁
해야할 일인가? 밤중에 택시 승강장마다 뒤엉킨 혼돈을 어떤 사람들이 만
드는가? 어린 청소년들을 타락의 제물로 삼아 절제없는 배설을 하기 위해
서 오늘도 함정에 빠트리게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각자 이 나
라의 발전적 개혁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민사회의 개혁운동은 신앙이나 종교와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인간 사회의 개혁은 인격의 변화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개혁은
신앙으로 인한 인간성의 변화와 갱신
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갱신의 모
델이 되어야할 신앙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초창기의 개혁정신이 쇠퇴할 때마다 자신
을 채찍질했던 표어를 다시금 소중히 떠올린다. ‘개혁은 날마다 다시 시
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