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정체성과 오늘의 현실
박영선 목사, 남포교회
“감성만 있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 아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교리와 헌신된 신자들에 의해 지켜져 왔다. 그러
나 시대를 거치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에로 변화하면서 점차 기독교는 본질
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를 놓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복음주의가 한창 확장되던 시대에 전파되기 시작했
기 때문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맛보지 못하고 복음주의의 결과인 부흥과 성
공만을 맛보았을 뿐이다.
점차 기독교 본질 잃어가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는 관심이 적고 대신에 신앙을 삶의 결실
을 통해 판단하는 경향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 복음주의는 실천, 영적 각성,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이런 이론적
이고 근본적인 면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공과 결과를 중시하고 그것이 기독교
의 목적인 것처럼 되고 말았다.
교회는 언제나 기독교적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러
나 어떤 교회도 기독교적 체험을 모두 경험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이런 체험을 누리기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권을 위
해 사용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기독교적 경험의 결과에 대한 욕심이 앞서게 되면 결과를 얻기 위해
본질인 생명과 진리를 포기하고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숫자로 결정하려고 한다. 그 앞에서는 성공이냐 아니면 실패
냐 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 받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자비와 통치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기독교 신앙을 후손
들에게 주셨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을 경험하고 이성으로써 그 체
험에 담긴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게 하셨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진리이기 때문에 체험으로는 다 경험할 수 없다. 우리
는 그 많은 체험 중 일부분을 경험하고 나머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을 알아가야 한다. 여기에 지성(知性)이 동반된다.
지성은 없고 감성만 있어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박해 아래 있었다. 신앙을 지키느냐 뺏기느냐 하는
일사각오의 신앙만 있었다. 지금은 순교를 각오하는 시대가 아니다. 평화의
때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삶의 전 영역에서 신앙이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과 우리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 또한 하나
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 무지할수록 신앙의
기쁨과 활력과 특권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복음주의가 병들게 된 것은 아
이러니컬하게도 미국 교회 부흥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대각성은 에즈워드
조나단과 무디 등 훌륭한 설교자들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대각성 운동과 함께 미국 교회가 부흥하게 되면서 기독교회의 전통
적 교리나 축적된 경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피상적인 기독교 신앙이 차지
하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고 즉각적 응답을 추구하게 되었다. 객관적이
며 보편적인 신앙의 표시나 고백이 사라졌다. 심지어 신학조차 필요 없게 되
었다. 기독교 신앙이 그만큼 단순화되었다.
신앙고백조차 등한시 해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의 단순화는 지성이 가지는 교만에 대한 반작용으
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수많은 신학적 논쟁은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것은 지성이 부패
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지성만 부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전인적으로 죄로 말미
암아 부패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뿐 아니라 의지, 감정까지도 부패해
있다. 이점을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앙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
다.
우리는 죄의 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통치와 그 안에서 인도하심에 대해 더 많이 생
각해야 한다.
신앙은 삶의 실체로 나타나는 것
참된 신앙은 기독교적 사고의 보편적 삶의 형태로 보여져야 한다. 곧 창조
의 회복이라고 하는 넓은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 안
에 우리 인생에 대한 답이 있다.
현대는 현대성의 시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친 다원
화 시대에 살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포기해버린 문명 추구를 후진국들이 지금 추구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문명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것으로 만족
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절대적 가치를 찾
을 수 없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최근 서구 사회는 동양 사상에 관심을 보이는 등 인생의 항구한 가치
가 어디에 있는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그들에게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요즘 교회를 보면 패
스트푸드점과 같이 되어간다. 모든 재료를 본사로부터 공급받아 깔끔하고 편
리하게 포장해서 파는 것처럼 교회가 능률과 편리함만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위로와 평안만을 주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교회
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선배들은 삶의 현실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차 신앙이 깊
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준비된 과정을 통고하면 단계별
로 신앙이 성장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단계를 거쳤는가를 가지고 신앙의 등급을 나누는 시대가 되었
다. 좀더 높은 단계를 거치면 초보자들보다 더 높은 신앙의 경지에 오른 것
으로 여긴다. 이것은 신앙에 계급을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신앙에는 계급 없어
우리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자. 죄의 오염이 우리 모든 삶의 전 영역에 영
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
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생각해야 한다.
머리 없는 몸통만으로는 신앙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이성을 강조하자는 것
이 아니다. 그렇지만 신앙에 이성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