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죄책, 그리고 형벌 <제6장 6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6장 6항: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어긴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으로, 죄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죄를 범한 자에게 죄책을 야기한다. 그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 묶이게 되며, 영적이며, 시간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과 더불어, 사망에 처하게 된다.”
본 항은 크게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첫째, 죄는 본질상 죄책을 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 죄책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죄책으로 말미암아 받는 형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이며, 일시적이며, 영원한 비참함과 함께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죄책으로 인한 형벌은 원죄(peccatum originale)와 실제적 범한 죄(peccatum actuale) 둘 다에게 해당됩니다.
죄의 오염과 죄책은 원죄에 의해서도 발생하며, 또한 실제로 범한 죄로 인하여도 발생이 됩니다. 여기서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의 구별과 관련해 원죄는 잠재적인 데에 반해 실제로 범한 죄는 잠재된 원죄가 현실적으로 드러났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죄는 단순한 잠재적 죄가 아닙니다. 원죄는 단순히 죄의 가능성이 아니라 원죄 자체도 이미 현실적으로 온 인류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현실적인 죄입니다. 여기서 실제로 범한 죄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습성이나 성질상의 죄가 아니라 실제로 활동으로 나타나는 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죄로 인하여 오염된 부패한 성품이 단지 습성이나 기질로 있는 상태를 넘어서 생각으로나 욕망을 통하여 마음으로 활동이 나타나든지, 아니면 입으로 더러운 것을 말함으로 나타나든지, 또 아니면 악한 행동을 통해 나타나든지 실제로 활동으로 나타나는 죄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와 관련한 죄책과 형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1. 죄는 죄책을 야기함
신앙고백서 6장 4항에서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한다”라고 고백하는 바와 같이, 죄는 본성의 부패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지금 살피는 6항에서 신앙고백서는 죄가 본성의 부패와 같은 오염의 결과뿐만 아니라,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의 책임도 또한 초래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이로써 신앙고백서는 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두 가지 효과, 곧 오염과 죄책에 대해서 모두 설명을 제공해 줍니다.
흔히들 죄로 인한 이러한 효과들로 인하여 죄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불립니다. 죄와 관련하여 “더럽고,” “성처를 입었으며” “병들었다”고 할 때 그것은 오염의 결과와 관련한 것입니다. 또한 “범죄,” “위법,” “빚”이라는 표현은 죄책의 결과와 관련하여 죄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①죄로 인한 오염의 상태에서 말갛게 씻김을 받는 것을 뜻하며, 또한 ②죄로 인한 죄책에서 면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 ①전자는 성령의 도움으로 인한 성화의 구원을 뜻하며, ②후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칭의의 구원을 뜻합니다.
2. 죄책은 죄로 인한 효과
죄책은 죄로 인한 효과이지 죄의 본질 자체는 아닙니다. 본 항에서 “죄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죄를 범한 자에게 죄책을 야기한다”는 진술이 의도하는 것은 죄책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죄는 그것의 본질 상 죄책을 초래하기 때문에 죄책과 분리하여 죄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죄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죄를 범하면 죄책을 반드시 지어야 하게끔 되는 죄와 죄책의 비분리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의 답은 본 항에서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어긴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으로”라는 표현 속에 있습니다.
죄란 본질상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어긴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으로” 불법성(anomia)을 갖습니다. 이 불법성이라는 죄의 본질은 행하여야 할 것과 금하여야 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명으로 행할 것과 금할 것에 대한 명령을 하시면서 동시에 불순종하여 불법을 행할 경우에 미치게 될 처벌에 대한 경고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죄책이란 바로 계명의 불순종에 대해 부가된 제재 조치와 관련한 죄를 말합니다.
불법으로서의 죄와 죄책으로서의 죄의 이해를 위하여 신자와 그리스도의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의 말씀은 신자에게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자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불법성은 여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반대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의 말씀은 그리스도에게는 불법성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책을 짊어지셨음을 교훈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의 말씀 또한 이 사실을 반영합니다.
3. 죄책으로 인한 형벌
신앙고백서는 죄책으로 인하여 받아야 할 형벌에 대하여 몇 가지를 나열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둘째는 율법의 저주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셋째는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그리고 사망의 형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일시적으로 육체에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형벌로 인하여 인간에게 미친 비참함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미치게 됨을 선포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영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엡 4:18 참조).
이처럼 내적인 영적 부패와 무능력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각종 환란과 재난과 비극과 고통과 눈물과 아픔의 비참함을 겪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구조는 전 피조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그리고 가장 무섭고 끔찍하게도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가 되고 마귀와 더불어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4. 피할 수 없는 죄책의 형벌
설령 죄책은 피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형벌은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책(reatus, guilt)은 죄를 범한 책임(reatus culpae)과 벌을 받아야 할 책임(reatus poenae)를 모두 포괄합니다. 범책과 벌책을 둘로 구분하여 죄책을 나누는 것은 매우 잘못된 시도입니다.
죄책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범한 책임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의 내용은 무의미해집니다. 즉 죄책이란 범책에서 야기되는 벌칙에 대해 의무 또는 책임, 곧 벌칙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범책이 사라지면 벌책도 사라지는 것이며, 벌책이 남아 있다면 결코 범책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설명이 중요한 까닭은 천주교회가 임의로 범책과 벌책을 구분하여 그릇된 설명을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천주교의 주장에 따를 때 범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으나, 벌책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는 비참함에서 죄인을 건지셨으며, 그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에서 놓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하는 벌책은 여전히 남아 있어 자신의 죗값을 치를 것이 신자들에게 요구가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책과 더불어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라는 벌책은 면케 하여 주셨지만, 신자가 이 세상 살면서 범하는 작은 죄들, 곧 하나님에게서 돌아설 의도가 없이 범하는 작고 소소한 죄들로 인한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이러한 벌책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요? 천주교회가 제시하는 길은 고해성사와 연옥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참회(contritio)를 하고, 범한 죄를 고백(confessio)하며, 사제로부터 사죄의 선언(absolutio)을 받고, 그리고 나서 행함으로 죗 값을 갚는 보속(satisfactio)을 행하여 합니다. 여기서 이 세상 사는 동안 보속이 충분치 않으면 연옥에서 정화의 기간을 통해 갚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리들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리될 수 없는 범책과 벌책을 떼어 놓는 잘못된 개념의 시도입니다.
마치는 말
죄책은 범책으로 말미암는 벌책을 모두 포괄하며, 이 둘은 서로 함께 있어 범책이 없으면 벌책이 불가능하고 벌책이 남아 있다면 범책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가 벌책을 일부 남겨둔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를 제한하는 매우 잘못된 주장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하여 단호하고 분명하게 “그로(죄책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 묶이게 되며, 영적이며, 시간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과 더불어, 사망에 처하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하여 소위 범책과 벌책이 죄책 안에 포괄이 되는 죄책의 요소임을 확실하게 밝힙니다.
그리하여 죄책으로 인하여 영적이며, 시간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들 속에 놓이게 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소망은 이 비참함의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을 시켜주시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데에 있음을 교훈하는 올바른 토대를 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