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혜의 뜨락 >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잘 싸워라”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
건전한 싸움은 자신과 상대방이 같이 누리는 결과가 되어야
창2:25절에서 보는 바같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는데 창3:7절에서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여 그 분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단이 제공한 악한 육신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순수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순수한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임전가, 편견, 악습, 핑계, 단절, 불순, 적개심, 수치심을 가진 악한 육신의 노예가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하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덕의 첫째되는 유일한 기반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해해준다 또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중요한지 모른다. 사람들이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흔히 하는 접근 방식은 그 일의 원인 분석과 그 일의 결과를 따진다.
그리고서는 제각기의 견해대로 평가하며 비난하거나 혹은 칭찬을 한다. 이것으로 모든 일을 평가를 하고 끝을 내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너무 서둘러서 고정하려고 하거나 충고하게 되면 오히려 문제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는 어떠한 비난이나 충고를 하거나 칭찬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탁월하고 객관적으로 사람을 보는 방법이 된다.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을 가리켜 “편견의 동물”이라고 지적하고 편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체로 편견에 사로잡히면 선입관념에 지배되고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래서 남에 대해서는 준엄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며 타인을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스스로의 허물은 덮어버린 채 자기 의와 자랑에만 급급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신념, 가치관, 환경, 생활 방식이 다르더라도 둘이 함께 살아가려면 조율할 일들이 많다.
서로 다른 점에 끌려서 사랑에 빠졌고 또한 그 다른 점 때문에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싸우는 것은 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같이 누릴 수 있는 싸움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 내가 본질적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