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성도의 선행의 의미_박동근 목사

0
72

<신학논단> 

성도의 선행의 의미  

 < 박동근 목사, 한길교회 >

우리는 불완전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선행을 추구할 수 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두 극단에 의해 공격과 왜곡을 받아왔음을 안다. 그것은 공로신학과 방종주의였다. 전자는 은혜만이 아니라 행위를 공로 삼아 구원받는다는 세미펠라기안주의적 율법주의고, 후자는 오직 은혜의 구원을 방종의 기회로 삼는다. 개혁교회는 이 둘을 철저히 배격한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이 칭의와 성화로 분리가 아닌 구분되는 이중은총이라 했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은 값없이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칭의는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 법적 구원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죄인은 성화의 은총으로 거룩을 추구해 간다. 칭의의 목적은 거룩한 자녀에 있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구원 적용이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 또 두 은총이 구분되어야 함은 한편은 법적이고 한편은 갱신적이며, 칭의가 성화의 토대가 되고 원인이 되는 논리적 인과적 순서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은 자에게 당연히 성화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신학과 실천은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거룩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오직 은혜의식을 명확히 정립하는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선행 혹은 성화의 열매의 의미를 바로 정립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행위로 끝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교회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이런 신학과 실천들이 나타난 바 있다. 혹 체계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런 행태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다. 오늘날엔 바울이 경계한 거짓 복음이 신학적 체계를 갖추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어느 분이 칭의는 과정이며 종말적 구원은 은혜만이 아니라 행위로 결정된다고 설교하는 걸 보고 당황한  적이 있다. 개혁교회의 선행관은 개혁교회 신조들과 신학적 유산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은 선행이 성도의 칭의의 원인이나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 이유는 성도 안에 남겨진 죄(여죄), 언제나 완전한 순종을 엄중히 요구하는 율법의 본성 때문이다. 레위기 18:5, 신명기 27:26 등을 비롯 특히 갈라디아서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이 완전한 것을 모두에게 요구함을 증거한다

   율법의 요구는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으로 그리고 동기 면에서까지 완전히 지켜져야 한다. 율법의 본성대로 하면 누구나 그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율법의 완전성에 비해 우리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완전을 향한 여정에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사실을 이렇게 밝힌다. “62.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워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이 늘 그 완전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포기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거부하실까? 그렇지 않다. 이렇게 불완전한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용서 때문이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가 불완전한 선행을 행할 때, 거기에 섞인 불의를 씻어내시고 용서하신다. 불의가 섞인 불완전한 선행을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 은혜 로 우리는 불완전해도 지속적으로 선행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다음과 같은 신학과 태도로 추구되어야 한다. 첫째, 선행을 행할 때 철저히 공로 의식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만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를 용서하시므로 받아주셔서 우리의 행위도 칭의하신다. 둘째, 성도의 선행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느냐 물으면 긍정할 수 있다

   성도가 순종할 때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복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은 기복적, 공로적 상급은 아니다. 성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은혜적인 것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3문답 참조). 셋째, 성도의 선행의 동기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4문답은 이 교리가 성도들을 선행에 무관심과 방종으로 이끌지 않느냐는 반론을 반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가치를 안다면 결코 방종하지 않는다. 우리의 죄로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감수하신 것, 그리고 십자가에 내려진 하나님의 공의의 엄중함도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

    진정한 복음을 성경을 통해 정립하고 경험했다면 우리를 용서, 용납하신 궁극적 이유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심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란 감사의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감사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목표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부족함 중에도 용서에 기대어 더 거룩한 삶을 추구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