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얻은 교회 치리권을 헐값에 넘겨버리는 세태_장대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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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얻은 교회 치리권을 헐값에 넘겨버리는 세태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언제부터인가 교회들에서 한 번 분란이 일어나면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 결국에는 세속법정에 가서야 비로소 판결을 통해 분란을 수습하거나 봉합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앞장서서 교회의 분란이나 분쟁의 해결을 세속법정에 의뢰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 개신교의 암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교회의 치리권이 어떻게 교회 자체의 권한으로 확립된 것인지 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치리권이 교회 자체적인 권한으로 확립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개혁의 시대의 무수한 피(죽음의 희생)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1. 교회의 치리권 확립 배경

 

기독교 초기의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황제가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고 관용을 선포하여 정식 종교로 공인된 일은 역사상 놀라운 일들 중 하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동안 압류했었던 기독교회의 재산을 환수조치를 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박해와 압류에 대해 국가적인 보상을 집행하기도 했다. 또한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 황제가 보장했었던 기독교에 대한 여러 보상과 보장들은 후대로 갈수록 점차 변질되고 로마제국 또한 쇠퇴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교황제의 기초를 닦은 레오 감독(Leo Magnus, 재위: 440-461)이 죽은 뒤, 그레고리 1세(Saint Gregory the Great 1, 540-604)에 의해 교황제도가 확립되면서 교회의 권세가 성장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속의 권세보다도 우월한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속의 권세에 의해 교회가 용인되고 보호되다가, 나중에는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권세가 어느덧 세속의 권세를 아우르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로 민족국가가 점차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히 프랑스를 비롯하여 독일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왕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과 세속군주의 권력 사이에 잦은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치리권마저 점차 세속군주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로마가톨릭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왕권이 강화되어서 교황청을 로마가 아닌 프랑스로 옮겨 아비뇽 교황청(Avignon papacy)을 세울 정도로 막강해 졌다. 이후로 서유럽에서 교회의 주교를 서임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국가나 지역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종교개혁자들은 세속 군주의 교회에 대한 권한 행사를 개혁하고 교회의 치리권을 교회 자체의 것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피)을 치러야만 했다. 이처럼 개신교회의 치리권은 원래부터 부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수한 희생의 피 가운데서 교회에 부여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교회의 고유한 권세인 치리권

 

교회 치리권의 독립은 성경, 그 가운데서도 복음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확고하게 보장되었던 내용이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세금징수에 대한 문제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권세의 지배력과 교회의 치리권이 각각 고유의 영역 가운데 양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로마서 13장 7절에서 사도 바울도 인용하는 내용으로, 사도 바울은 권세들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며 이르기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롬 13:4)인 세상 권세들을 인정하고 있다. 즉 교회의 치리권만이 아니라 세속권세의 정당한 집행 또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6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 간의 다툼 문제를 세속법정으로 끌고 가는 일을 개탄하여 이르기를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책망한 바 있다. 곧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서 오히려 성도들이 판단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보다 못하게 된 교회의 치리하는 자에 대하여 심각하게 책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가 다시 확보한 치리권은 세속정부가 행사하는 것과 다른 교회만의 특별한 성격이며, 그러한 교회의 치리권은 교회가 세속정부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세속정부도 교회에 대해 보장해야 마땅한 독특한 권한인 것이다.

 

  1. 힘써야 할 교회의 치리권 회복

 

성경적으로나 기독교 역사로나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교회의 치리가 형편없이 부패하여, 마치 고린도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책망했었던 그 교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의 개신교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교회의 치리와 관련한 일들, 이를테면 교회에서의 분란이나 질서의 문제를 포함한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세상의 법정으로 끌고 나갈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회의 치리권에 대한 권면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는 이를 가리키고 지도하며 치리해야 할 자들인 교회의 직분자들이 앞장서서 세상법정의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간음이나 횡령과 같은 세속법에 저촉되는 문제들뿐 아니라, 교회의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분쟁이나 교회법의 해석 혹은 적용과 관련한 치리의 내용들마저도 지교회의 당회나 노회 등의 재판절차를 불신하는 일들이 횡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뢰성을 잃어버린 교회들의 치리권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교회의 치리권이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입장차가 아니라 성경의 유일한 규범으로 시행되도록 해야 하는 직분자들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할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는 불의한 형편 가운데서도 교회의 치리권이 어떤 피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로 돌려진 것인지,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은 것이 낫지 아니하냐”는 말씀이 나타내는 바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불의하고 강퍅한 이 시대에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있는 것이 마땅한 신자의 자리임을 명백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신중함과 성경 중심의 판단기준을 잃어버리고 세속법정에 기대는 것은 결국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절)인 성경을 벗어난 또 다른 오류와 배도의 길을 가고 있음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