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시대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하나님 앞에서 했던 임직자들의 선서마저 지키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인공 지능을 기반으로 한 슈퍼컴퓨터가 점차적으로 신산업 아젠다(agenda)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에 교회는 직분과 상관없이 불법이 횡행하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자식을 죽이는 극단성이 난무한다. 이 같은 교회의 불법적 후진성은 사회적 지성이 만들고 있는 현실보다 가치 없는, 실천적 무속주의로 평가를 받는 수모를 감내(堪耐)해야 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사회가 혹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아니다. 또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자기 자식을 죽이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지금 하나님의 형벌 가운데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무속주의에 빠지고 있는 교회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도,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때도 사람들의 종교적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만 들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는 희망이 아니라 전쟁과 포로됨이 찾아 왔을 뿐이다.
우리 시대는 엄청난 종교성으로 충만하다. 서울 거리에 교회 없는 곳을 찾을 수 없고, 대형 교회는 하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있다. 심지어 정치인들조차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두려워서 이런 저런 눈치를 보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위정자들에게 신앙이 없어도,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예배를 고위 공직자를 위해 드려주는 형편이다. 마치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앞에서 승리의 예언을 장담했던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와 같은 형국이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묻는 사람도 없다. 관심도 없다. 때문에 무서운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은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목사의 소명이 하나님께 확인하지 않은 지 오래다. 목사 후보생이 되는 과정에서 교회로부터 공적 소명을 확인 받지 않고, 개인적 감격을 빌미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오래되었다. 당회가 오랫동안 살펴 시험하여 노회에 천거하여 노회의 시험과 추천을 통해 목사 후보생이 된 자를 신학교가 위탁을 받아 양성하는 일이 드문 시대이다.
공적 소명 없이 목사가 되기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노회를 통해 개척하고, 교회의 공적 청빙을 통해 목사로 임직을 받는 엄중성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이다.
장로교 목사로서 최소한 임직 때 가졌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성경에 총괄하는 교훈으로 받고 신종하겠다고 한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선서가 존중되지 않는 놀라운 시대이다.
즉 오늘날은 목사에게서 양심의 선서가 무겁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 과연 목사에게 윤리나, 정의를 물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의 과정과 양심조차 존중하지 않는 조국 교회의 현실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목사가 이 정도인데, 장로에게 소명은 어떠한 상황일까? 장로의 소명이 무엇인지,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 역시 오래다.
장로교의 장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여 성도들에게 진리의 보살핌을 받게 하는 선물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장로는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행복, 그리고 교인 숫자 증대에 관심을 가질 뿐 교회의 진리를 살피지 않은지 오래다.
장로의 임직을 받을 때 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과 교회 정치와 권징 조례와 예배 모범”을 순종하겠다고 했던 선서를 따라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과 전공과 경험으로 교회를 섬기려 할 뿐이다.
세상 기준으로 교회 섬기려 하기도
장로가 이 정도이니 집사에게 소명은 정말 우스운 것이다. 누가 집사의 소명을 묻는다는 말인가. 집사는 말 그대로 장로가 되기 위해 거치는 일종의 과정적 직분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치리를 따라 진리의 총체에 벗어나지 않게 스데반과 빌립 같이 진리를 말하는 집사를 보기 어렵게 된 것이 너무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심지어 길에 차이는 것이 집사들이다. 소싯적에 집사 아니었던 사람이 없을 정도다.
우리의 현실이 이런데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것이 아니요, 마실 것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가 완전히 단절되어 진짜 목사, 진짜 장로, 진짜 집사를 만날 수 없는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직분의 가치와 의미가 상실된 현실에서 과연 하나님의 진리의 가장 높은 의미를 산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진리의 가장 높은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씨름하는 사역자가 있다고 치면, 오히려 현실을 모른다고 무시한다. 목회를 모른다고 조소한다. 심지어 교조주의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비근한 예로, 목사가 성삼위일체의 실체의 통일성을 따라 설교하기 위해 힘쓰고 애쓰면 성도들은 별로 수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점심 식사 이후에 주방 설거지를 하고 도우면 목사가 섬기는 것으로 오해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목사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말했다는 사실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진리의 말씀 앞에 서 있어야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충성됨이다. 여기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실제로 죽게 될 것임에도 우리끼리 서로 자위하고 있는 교수대 위의 사형수와 같은 꼴이 될 뿐이다. 세상이 자신들과 함께 우리의 죽는 것을 보고 조롱하고 있는데, 우리만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형 집행관의 칼춤을 즐거워하는 모양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권고하려니와……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사 66:2,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참된 교회는 우리의 부패한 종교성과 역사에 의해 누적된 보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목사와 장로와 집사에게서는 이런 대중적 보편성조차 거부되는 현실이 있어야 한다.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섬기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게 교회를 진리로 총찰(總察)하는 부지런함과 충성됨이 있어야 할 뿐이다.
“이제 남은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된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여호와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되어야 할 뿐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두려운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두려워 할 줄 알아야
목사가 자식을 죽였다. 장로가 거짓말로 정치를 했다. 집사가 부정부패로 사업을 일삼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성도가 온 땅에 가득한 이 현실이 가장 무섭다.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과 의를 따라 나팔 불고 노래하는 이 현실이 너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