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차 프랑스위그노연구소 정례회 참관기
류성민 교수(합신 역사신학)
2025년 8월 21일 수원 소망교회당 에서 제11차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정례회가 열렸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 하고 60명이 넘는 분들이 기쁜 마음 으로 참석했고, 연구소 소장인 조병수 박사는 “저항하라”(RÉGISTER)는 제목으로 마리 뒤랑(Marie Durand) 의 신앙적 저항에 관해 열정적인 강의를 펼쳤다. 조 박사는 자신이 직접 방문하고 조사하며, 연구한 내용들을 기초로 마리 뒤랑의 삶과 신앙에 대한 객관적이며 공정한 해설을 하고, 이를 통한 정당한 평가와 마땅한 교훈을 전해 주었다.
마리 뒤랑은 대체로 저항의 대명사로 이해된다. 그녀가 38년간 수감되었던 꽁스땅스 탑 상층 중앙 돌 테두리에 새겨진 “저항하라”(régister)는 문구는 그녀의 상징과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그 문구 하나로 정의될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오랜 기간 투옥 생활을 하게된 주요한 원인은 그녀의 오빠 삐에르 뒤랑에 기인했다. 삐에르 뒤랑은 18세기 초반 형성된 프랑스 개신교의 “광야 노회”에 참여하고 훗날 목사로 임직하여 남프랑스 교회의 재건을 시도 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은 가족에게큰 환란을 가져왔다. 1719년 어머니는 불법 예배를 연 것으로 고발되어 체포 후 실종되었고, 아버지도 결국 1729 년 체포되어 아들과 관련된 일로 가혹한 심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한편 삐에르는 1726년 ‘광야 총회’에서 목사로 임직한 후, 말을 타고 산과 골짜 기로 다니며 열정적인 비밀 순회 목회 사역을 감당하였다. 당국은 그를 붙잡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십자가 아래의 교회”를 목회했다. 당국은 삐에 르를 체포하고자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1729년 아버지가 체포되고, 이듬해 동생 마리 뒤랑도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1732년 비밀 순회 목회 중 체포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 체포 당시 삐에르는 장전된 권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이 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총은 늑대와 도둑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지, 국가의 공권력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순히 체포된 후에 왕과 국가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지켰 고, 개종을 촉구하는 신부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를 표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고결한 성품과 자태는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 경의를 자아냈다.
1711년 출생한 마리 뒤랑은 1730년 체포되어, 프랑스 최남단에 위치한 애그모흐트의 꽁스땅스 탑에 수감되었 다. 꽁스땅스 탑은 13세기 십자군 요 새 중 하나로, 17세기 말부터 위그노 들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남자도 수용되었으나 1720년부터 여성 감옥으로만 사용되었다. 이 감옥은 가난한 여성들의 수감소로 악명이 높았다. 채광이 좋지 않았고, 습했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극히 취약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금되어 있어 사생활이 불가능했고,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감염되는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수감자들 사이에 신분, 출신 지역, 종교적 성향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고, 끊임없는 신앙 철회의 유혹이 눈 앞에 있었다. 임신한 수감자들도 출산 후양육하는 문제도 심각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오랫동안 수감되면서, 교회가 그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큰 두려움이 었다. 수감 기간이 30년이 넘는 사람 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고통은 일반 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편 외부에서는 꾸준히 꽁스땅스 탑의 수감자들을 석방하기 위한 노력 들이 있었다. 1760년대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고, 마리 뒤랑은 1768년 4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녀의 수감기간은약 38년이었다. 19세의 소녀가 57세가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후 그녀는 궁핍한 삶을 살았지만,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했고, 성경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 신앙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을 보냈다. 자유를 얻은 후 8 년을 더 살다가 1776년 7월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리는 탑에서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여성들에게 안정됨과 견고함을 주어 가톨릭의 회유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약속에만 소망을 두도록 이끌 었다. 수감자들을 위해 매일 밤 기도와 성경 읽기와 시편 찬송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병자들을 돌보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밖에 있던 유일한 친족인 조카 안느를 돌보려는 노력도 했다. 이러한 마리의 내외부 관계와 활동을 우리는 그녀가 보낸 서신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녀가 외부와 가진 관계라는 사회적 측면, 멋진 필체와 우아한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교양적 측면, 조카에게 가진 애정과 기대, 그리고 실망과 고통이라는 개인적 측면과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개혁파 신학에 충실한 영적 측면을볼 수 있다.
조병수 박사는 “저항하라”는 글귀가 유명하지만, 그것이 단지 마리가 썼을 것이라는 추측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머물면서, 압제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모든 이들에게 관련된 절박한 권면 임을 강조했다. 마리 뒤랑은 외부적으로 신앙의 영웅적 사역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 으로 인해 고난의 삶을 견뎌야 했고, 생존을 위해 일상의 신앙으로 버틴 사람이었다. 마리에게 꽁스땅스 탑의 하루는 자신의 신앙을 위한 저항이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억누르는 세상의 세력에 대해 ‘아니오’를 말하는 저항이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에 대한 저항이고, 낙담하려는 자신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마리는 고난과 박해의 일상에서 자기 신앙을 살아낸 여성이었다.
조 박사의 연구는 핍박받는 위그노 여성 마리 뒤랑의 신앙적 생애에 대한 단순한 정리가 아니었다. 기존 연구의 흐름을 정리하며 판단하고, 뒤랑의 삶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인 오빠 피에르와 관련된 주제를 통해 그녀의 신앙적 고난의 뿌리를 정리하고, 이후에 그녀가 현실적 곤란 가운데 어떻게 삶을 지탱하며 살았는가에 대해 그녀의 서신과 친족과 지인들의 관계를 통해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감히 단언컨대 마리 뒤랑에 대한 연구 가운데 이렇게 친절하며 객관적이며 감동적인 연구는 없을 것이다. 사견으로, 마리 뒤랑의 후예들이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프랑스 위그노연구소의 정례회는 조덕래 목사의 설교와 수원 소망교회(김 정민 목사)의 커피와 간식, 전주에서 올라온 기정떡(김춘기 목사)과 천안에 서 온 호두과자(유영권 목사)라는 섬김으로 마리 뒤랑이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의 습득에 더하여, 다른 즐거움 또한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조만간 공연될 마리 뒤랑을 소재로 하는 뮤지컬 <저항: 위그노 이야기>의 제작진과 출연진들도 정례회에 참여하여, 사역과 공연을 소개하는 유익한 시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례회를 마치고 답례품 으로 증정된 칼빈상(Jean Calvin 미니 오브제)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오의석 교수가 제작하여 연구소에 전시 중인 칼빈상을 축소 제작한 것으로, 프랑스 신앙의 피난민이자 종교개혁 자인 칼빈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구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더하여 칼빈상을 포장하는 상자는 옛 제네바의 전경을 담은 그림 지도와 칼빈의 서명을 담고 있어,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교훈과 유익을 담고 나누려는 연구소의 세심함을 잘 보여주었다.
고난받는 성도의 신앙적 저항을 다루 었던 이번 정례회를 이어, 2026년 2 월 12일에 열릴 다음 정례회는 “프랑스 위그노 ‘광야교회’(L’église sous la croix)”를 다룰 예정이다. 프랑스 위그노 교회가 어떤 고난을 받았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이야 기와 교훈을 듣고 공부할 것을 더욱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