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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이해

< 한병수 박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강사,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소장 >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꽃이며 성경의 주제이며 삶의 정수이며 인생의 절정이며 영혼의 잔치이며 최고의 사건이며 복 중의 복입니다. 예배에 관하여 이것보다 명료하고 강력한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관건은 무엇보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릴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온갖 종류의 예배를 일별해 보십시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우상숭배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물속에 있는 것들일 수 있겠고 거기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더한다면 예배의 종류는 천문학적 수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며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속성은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예배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면 비록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신”(Ἀγνώστῳ θεῷ)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배의 진정한 개념도 애매해질 것이고 예배의 합당한 방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경배하는 아테네 지성들의 빈곤한 신개념과 재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는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에 엄중한 일침을 가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손으로 지어지거나, 영원 전에 계시지 않으셨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2.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아테네 이방인의 무지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예배의 유일한 처소가 예루살렘 지역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과도한 종교성을 부여한 지역주의 맹신의 희생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유대인의 ‘지역주의’ 오해를 듣고 예루살렘 지역을 예배의 처소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즉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 같은 특정한 장소에 특별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계시며 누구와도 만나시며 언제든지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순서가 구비되지 않으면 예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진리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올바른 예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 차원에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혼은 어떤 식으로도 꾸며지지 않는 곳입니다. 예배의 무늬만 갖추는 가식이나 연출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우리의 타락과 비참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발견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추한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무지 예배자의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삼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가 계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내주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가슴에서 터지는 감격과 눈물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크고 무한한 은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을 예배의 지고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가 보여준 주님과의 신비로운 조우와 연합의 사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지라도 영혼의 신령한 상태만이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란 문구를 추가하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영혼과만 결부되지 않고 삶을 의미하는 우리의 몸과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시며 성경 전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란 방식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배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 전체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인격과 전생애가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또한 예배에 속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다”는 바울의 권고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해서 볼 때 자칫 바울이 예수님의 예배관에 무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적인 쌍극으로 이해한 이원론적 사유에의 무의식적 적응이 빚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영혼과 몸을 과도하게 분할하지 마십시오. 영과 몸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상응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무관한 다른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몸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은 삶을 의미하고 바른 삶은 진리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이 12장에서 밝힌 몸의 산제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경 전체의 영적인 구속사적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씀은 영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에 모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은 삶입니다. 몸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든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배에 대해 원천봉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만 경배를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지 않고 진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믿고 알고 몸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처럼 최고로 복된 삶입니다. 삶이 예배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라는 바울의 권고를 빌미로 삼아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하는 기독교의 장구한 전통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은 주님의 다른 말씀을 핑계로 자신의 기호를 슬그머니 표출하는 야비한 극단인 것 같습니다.

 

마치는 말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이나 다른 날들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범례를 배우고 익히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데나 아무 때나 적용하는 고질적인 악습은 이제 기독교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도록 조속히 근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처럼 보인다고 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는 남아나는 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어떠한 삶이 바른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배하고 진리를 깨닫고 딱 그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신 분이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배를 드리고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