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공동체를 위한 성탄(엡 2:14-15)_한병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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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위한 성탄(엡 2:14-15)

한병수 교수(전주대 선교신학대학원, 전주대학교회)

 

성탄의 기적은 순간이고 의미는 영원하다. 성탄의 의미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여 영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창조자가 피조물이 된 성탄,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무한까지 건너 우리에게 오셨을까? 성탄은 성자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선물로 주어진 사건이다. 성탄의 의미에 대해 바울은 샬롬, 즉 평화라고 평가한다. 성탄의 순간에 불린 천사들의 노래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눅2:14)라고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엡 2:14)로서 하나님과 죄인의 평화, 사람과 사람의 평화, 사람과 자연의 평화시다. 평화는 공동체의 본질이다.

이런 평화는 영원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성탄은 아버지의 품에 있는 꿈을 꺼내 우리에게 보내신 사건이다. 그 꿈은 태초부터 암시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후 마지막 날에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남자도 사람이고 여자도 사람이다. 그런데 모세는 남자와 여자를 ‘사람들’로 표기하지 않고 ‘사람’으로 규정했다.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둘인데 한 사람일까? 근거는 여자를 향한 남자의 고백, 즉 인류 최초의 프로포즈 안에서 발견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창 2:23). 이 고백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서 하나의 사람이 되게 만드는 관계의 끈이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데 어떻게 두 사람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태초에 개별적인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으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 공동체적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으셨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무너졌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부서졌다. 죄는 관계의 끈이 아니라 무한한 틈이었다. 이사야의 기록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나누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나누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너진 공동체를 좌시하지 않으셨고 온전한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접지 않으셨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 사건이 성탄이다. 그런데 바울은 보냄 받으신 예수님을 ‘우리의 샬롬’으로 명명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고 나와 너 사이에도 평화를 이루셨다.

평화의 방법에 대해 바울은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설명한다(엡 2:14). 샬롬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수단으로 삼으셨다.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십자가에 놓으셨다. 이는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할 때만 가능한 희생이다. 첫째 아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셨고 우리를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다. 고백만 하고 살아내지 못한 첫째 아담과는 달리, 둘째 아담은 입이 아니라 몸으로 그 고백을 이루셨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이 새롭게 만드신 샬롬 공동체는 ‘한 새 사람’이다(엡 2:15).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태초의 사람은 ‘한 헌 사람’이고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그에게 연결된 모든 지체로 구성된 그의 몸은 ‘한 새 사람’이다. 회복된 샬롬 공동체의 특징은 예수님이 모든 지체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 각 지체는 그 머리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 지체와 지체는 서로에게 확대된 자아라는 것, 한 지체가 머리와 분리되면 죽고 다른 지체와 분리되면 고통과 불행과 비참에 빠진다는 것, 그런데 머리와 몸은 영원히 분리되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 등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버리셨고 새로운 몸을 얻으셨다. 그 몸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 즉 하늘의 죽은 의인들과 땅의 산 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새 사람인 샬롬 공동체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여기에서 땅끝까지, 땅에서 아버지의 보좌 우편까지 아우른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실현할 수 없는, 상상도 닿지 못하는 가장 위대한 규모의 샬롬 공동체를 위하여 성육신이 일어났다. 이 공동체는 이 세상의 권세만이 아니라 음부의 권세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소멸되지 않고 중단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이로써 성탄의 의미도 영원하다.

성탄의 의미를 누리는 방식은 샬롬이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 샬롬을 이루셨고 우리 모두를 자신의 몸으로 가지셨다. 이 원리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다른 지체를 나의 확대된 자아로 삼는 비결은 나를 타인의 지체로 선물함에 있다. 타인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함에 있다. 이런 사랑으로 다른 지체와 화목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광의 찬양과 경배를 멈추라고 명하신다. 돌아가서 불화한 형제와 화목한 이후에 오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꿈은 모든 지체들의 화목을 통한 샬롬 공동체의 회복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이루라고 권고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경고까지 한다(히 12:14). ‘모든 사람’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해도 좋다(계 7:9). 중간에 막힌 담을 다 허무신 예수님의 화평은 그 모든 단위를 능히 아우른다. 첫째 아담의 허리에서 난 모든 사람 중에서 택하신 모든 사람이 둘째 아담의 몸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샬롬 공동체가 완성된다. 이런 하나님의 꿈을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다(고후 5:18). 이 평화의 직분은 저절로 수행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때 수행된다. 평화의 비용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공동체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평화가 유지된다.

성탄절은 불화한 모든 자들과 화해하고 나에게 죄 지은 모든 자들을 용서하는 평화의 날이어야 한다. 샬롬 공동체의 꿈을 상기하고 날마다 그 꿈의 성취를 위해 헌신하는 결단의 날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