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인물: 믿음의 군인 꼴리뉘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하나님의 영광과 공공의 평화가 보장될 수만 있다면, 내게 해를 입힌 일들 정도는 기꺼이 모두 잊을 생각이다.” 이것은 프랑스에 신교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 위그노를 이끌었던 출중한 군인 꼴리뉘가 남긴 유언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 ‘오라투와르 루브르 신교 교회’가 있는데, 그 뒤뜰에 우뚝 서 있는 꼴리뉘의 동상 아래 돌비에 그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가스빠르 꼴리뉘(Gaspard Coligny, 1519-1572)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형제 가운데 셋째 아들이었다. 맏형은 일찍 사망하였고, 추기경이었던 오데, 가스빠르, 엉델로의 영주 프랑수와는 후일 모두 위그노가 되었다. 어머니는 유명한 대원수 몽모랑시의 여동생이었는데 일찍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신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런 배경에서 자란 꼴리뉘는 국왕 프랑수와 1세와 앙리 2세의 군대를 개혁하는 역량을 발휘하여 군인으로 승승장구하였고, 1552년 해군 제독 직위를 얻었다. 1557년 꼴리뉘는 생껑땅을 방어하는 책임을 졌지만 스페인 군대에게 참패를 당해 2년 동안 포로가 되었다. 이미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인 동생이 1558년쯤 보내준 깔방의 글을 읽고는 신교로 돌아서 위그노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561년 가을, 꼴리뉘는 베자와 함께 뿌와씨 회담에 참석하였다. 위그노의 현황을 보고하라는 모후 까뜨린느의 요청을 받고 프랑스 전국에 2,150개 교회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회담의 결과로 위그노에게 성 밖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1562년 3월 1일(주일) 동프랑스의 작은 도시 바씨에서 예배로 모인 위그노들을 앙리 기즈의 가톨릭 군대가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을 계기로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종교전쟁이 터졌다. 꼴리뉘는 처음 세 번의 전쟁에서 위그노를 대표하는 꽁데(Condé) 왕자의 군사령관으로 활약하다가 왕자가 전사한 후에 위그노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패전해도 다시 군사를 일으키는 모병의 귀재로 가톨릭 진영에 공포를 자아냈다.
1571년 4월 2일~22일에 라로쉘에서 제7차 위그노 총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떼오도르 베자가 의장을 맡았고, 1559년 초대총회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를 프랑스 신교의 공식고백서로 인준하였다. 꼴리뉘는 나바르 왕국의 쟌느 달브레 여왕과 함께 평신도 대표로 총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서 인준에 서명을 남겼다.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상태였던 꼴리뉘는 베자 같은 주변 인물들의 강력한 권유로 총회 직전인 1571년 3월 25일에 쟈끌린느와 재혼하였다.
구교와 신교를 화합시키려는 시도가 급물살을 타면서, 가톨릭을 대표하는 모후의 딸 마르그리뜨와 위그노를 대표하는 쟌느 달브레의 아들 앙리(후일 국왕 앙리 4세)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어 1572년 8월 18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혼인예식이 치러졌다. 꼴리뉘와 위그노 귀족들이 하객으로 대거 파리에 입성하였다. 가톨릭 세력은 기회를 놓칠세라 꼴리뉘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특히 꼴리뉘를 부친의 살해자로 믿는 앙리 기즈의 복수심이 발동되었다. 결혼식 나흘 후 꼴리뉘가 스페인에 대항하는 네덜란드를 지원하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국왕 샤를르 9세를 알현하고(국왕은 꼴리뉘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하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을 맞았다. 불길함을 느낀 측근들이 피신을 권유했지만 부상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8월 23일 밤, 왕궁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국왕에게서 파리의 위그노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재가를 강제로 받아냈다. 24일(주일)로 넘어가는 밤부터 “바뗄레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꼴리뉘의 숙소를 덮친 기즈의 수하들은 꼴리뉘를 난도질하여 이층 창밖으로 내던졌다. 기즈가 확인하자 목을 베어 머리를 왕후에게 보냈고 로마의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머리 잘린 꼴리뉘의 시신은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교수대에 매달렸다. 그의 사촌이 시신 가운데 몇 조각을 건져내 고향에 묻었다. 위그노 믿음의 군인으로 최후를 맞이한 꼴리뉘의 동상 아래에는 두 성경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시 112:6),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참았음이라”(히 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