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실낙원과 복락원_박형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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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과 복락원

박형용 목사(합신 명예교수)

 

하나님은 말씀으로 죄 없는 완벽한 세상을 육일동안에 창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지으신 창조 세계를 보시고 기뻐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완벽한 세상에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창조된 인간인 아담(Adam)과 하와(Eve)를 그곳에서 살게 하셨다(창 2:8). 인간은 참으로 완벽한 낙원(樂園)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을 사용한 사탄(Satan)의 꾀임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여 죄인의 길을 걷게 된다(창 3:1-8). 인간은 낙원을 상실하는 처지가 되었다(창 3:22-24). 낙원을 상실한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목의 관계가 되었고, 자연과의 관계도 온전하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인간과의 관계도 불화의 관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인간은 문제투성이에 쌓여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되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원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역사 안에서 일정 기간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초월해서 살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어거스틴(Augustine), 칼빈(Calvin), 루터(Luther), 카이퍼(Kuyper), 바빙크(Bavinck), 워필드(Warfield), 찰스 핫지(C. Hodge), 에이 에이 핫지(A.A. Hodge), 머레이(Murray), 박형룡, 박윤선 등 모든 학자들도 그들의 역사적 환경을 뛰어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한다.

칼빈이 그 시대의 역사적 환경을 초월해서 살지 못했다는 단적인 예는 그의 많은 저서에서 “교황제도 옹호자” 혹은 “교황주의자”(papist)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칼빈이 5세기에 살았다거나 21세기에 살았다면 “교황주의자”라는 용어를 그의 “기독교강요”나 주석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한 때 야고보서(James)를 지푸라기 서신(후에 교정함)이라고 평가절하 한 것은 그가 중세의 신학적 혼란 시기를 등에 업고, 칭의를 강조한 종교개혁시대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박형룡 박사님, 박윤선 박사님이 그들이 받은 교육적 배경으로 보아서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을 주장했어야 할 것 같은데 역사적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주장한 것은 그 당시 한국교회가 일본의 식민통치와 공산주의의 핍박으로 인해 성도들의 일상생활이 피폐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삶을 더 효과적으로 위로할 수 있는 신학적 이론이 역사적전천년설이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물론 무천년설이나 역사적전천년설은 성경을 근거로 확립된 신학 입장이기 때문에 어느 입장을 취하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최근에는 역사적전천년설 보다는 오히려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박형룡 박사나 박윤선 박사의 경우 그들의 교육 배경과는 달리 역사적전천년설을 주장하셨던 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잘 판단하고 신학적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간 모든 역사적 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을 초월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언급한 개혁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혁주의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풀어서 정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당시의 사회적 무게에 눌려 살지 않고 성경의 교훈에 근거한 바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사람은 잘못을 주장할 수 있지만 성경은 잘못될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내용에 일치하는 신학입장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로 오염된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실낙원(失樂園)을 실낙원으로 남겨두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락원(復樂園)으로 만들어 주셨다. 실낙원과 복락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함께 요한 밀턴(Milton)의 이름이 떠오른다. 요한 밀턴은 “실낙원”(Paradise Lost), “복락원”(Paradise Regained)과 함께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이라는 유명한 작품들을 남겼다. 밀턴은 1608년 12월 9일에 런던(London)에서 태어나 1625년 그가 17세 되던 해에 캠브리지(Cambridge) 대학교의 크라이스트(Christ) 칼리지에 입학했다. 밀턴이 1629년 졸업반 때 쓴 그의 시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날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는 많은 주목을 끌게 했다. 밀턴은 한 평생 가정의 문제로, 정치의 문제로, 그리고 육체의 병마 문제로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는 말년에 실명(失明)을 한 상태로 통풍으로 고생하다가 1674년 11월 8일에 자기 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밀턴은 66년 동안의 나그네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밀턴은 실낙원 제 10편 55행에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하여 내 대리자인 아들 너 아니고 누구를 보내랴. 하늘과 땅, 지옥 등 일체의 심판을 너에게 맡기노라”라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서 65행과 70행에서 예수님이 “영원의 아버지시여, 임무를 명하심은 당신의 일이고, 지고하신 당신의 뜻을 하늘과 땅에서 수행하는 것은 내 일이니 당신은 사랑하는 아들인 내 안에 언제나 즐거이 계시나이다.”라고 쓴다. 물론 밀턴의 실낙원과 복락원은 정확무오한 기록은 아니다. 하지만 유명한 시인 밀턴이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계획,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복락원의 소망을 시로 표현한 사실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성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살고 있다(빌 3:20; 요 5:24). 성도들의 삶은 목적 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요, 목적이 뚜렷한 순례자로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약간 고통스럽고 어려울지라도 성도들은 고통도 없고, 병마도 없고, 죽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복락원의 회원권을 소유한 특별한 사람들이다(롬 8:18-25; 고전 15:50-58; 빌 3:20 ). 성도들은 약간의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15: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