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 지상강좌(7)
칼빈 신학의 중심에 대한 소고
-부제 | 칼빈은 누구인가?-
고경태 목사_주님의교회
2009년은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1564년 5월 27일) 탄생 500주
년으로 개혁파들의 심장을 흥분시키는 해이다. 그러나 개혁파란 어떤 날에
의미를 두지 않고, 주의 재림이 오기까지 개혁을 쉬지 않는 것이다.
500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칼빈의 후예들이 칼빈의 신학을 연구하여 발표하
는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칼빈 신학을 탐구하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인지 2009년은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년 2월 12일-1882년 4
월 19일)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된다고 하여, 그 쪽 진영에서도 분주한 연구
세미나가 진행된다고 한다.
칼빈이 태어난 후 300년 뒤에 다윈이 이 땅에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의 이해
를 반할 수 있는 이론의 근거(『종의 기원』 발간 150년)를 마련하였다. 그
러나 500년과 200년 뒤에 후예들의 진로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500년 뒤
에 있는 칼빈의 후예들은 어떻게 하면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고 정당하게 계
승할 것인가에 포커스가 되어 있다면, 다윈의 후예들은 진화론을 어떻게 수
정하고 보완할 것인가 대해서 논의하는 장이 열리는 것이다.
칼빈의 후예들은 칼빈의 신학을 잘 이해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많은 몸부림
을 하고 있으며, 500주기라고 하여 시간에 의미를 부여했으니 더욱 발전된
신학의 내용이 개진되기를 기대한다. 아직도 칼빈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칼
빈에 대한 합치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1. 칼빈 신학에 중심이 있는가?
모든 기독교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신학과 목회를 추구함에 있어서 사상의 중
심을 갖고 있다. 이 중심을 놓고 이해해야 학문과 목회의 진전과 토론이 가
능하게 될 것이다. 목회는 실제이기에 이론적 토의에 효율성이 적지만, 학문
적 논의에서는 전개한 이론에 있어서 중심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게 된다.
그 사람을 잘 안다는 것은 ‘그가 논의하는 중심된 사고’와 ‘전 사상을 엮
는 끈’을 아는 것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기억한다 할지라
도 중심된 논의를 놓친
다면 꿰여지지 않는 서 말의 구슬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종교개혁 전집』(Corpus Refomatorum)으로 59권으로 편집됨)에 대한
많은 대명사가 있는데 목회자(설교자), 신학자, 주석가, 교육자, 정치가 등
이 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칼빈을 ‘프랑스를 사랑하는 복음의 전도자’
라고 명칭을 부여하고 싶다.
칼빈은 회심을 경험한 후에 자국에서 복음을 증거하기를 희망하였지만, 피난
길에 서게 되었으며, 파렐의 권고로 제네바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
이 민족을 사랑함에 구원의 열정을 갖고 있으면서 이방으로 복음 전도한 것
처럼, 조국에서 피난하여 이방의 제네바에 있으면서 조국을 향한 복음에 대
한 칼빈의 열망을 곳곳의 글에서 볼 수 있다(참고, 테아 반 할세마,『이 사
람 존 칼빈』, 성약).
무엇이 칼빈을 이토록 만들었는가? 당대의 가장 명석한 지식인이 회심한 근
원은 무엇이었는가? 모든 것이 보장된 조건에서 돌이킨 회심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칼빈에게 과거는 철저하게 침묵되었다.
칼빈은 현재와 미래에 펼쳐진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였
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
해서 회심 후에 그토록 모진 고난(교회, 국
제간 내적 외적의 대적, 아내와 자녀의 죽음, 필자의 질병) 속에서도 다시
돌이키지 않았던 그것이, 즉 칼빈을 변화하게 한 장필자가 바로 칼빈 신학
의 중심이 될 것이다(당대의 인문주의자로 맹렬하게 로마 교회를 비판했던
에라스무스는 루터와는 중도적으로 로마 교회 신학을 변호하며 신학 논쟁을
하여 종교개혁에 선도하지 못하였다).
2. 칼빈 신학의 중심에 대한 논의
칼빈이 가르친 신학이 네델란드(도르트뤠히트 회의)와 영국(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서)의 스코틀랜드(장로교회) 그리고 신앙고백(벨직 신앙고백, 하이델
베르흐 신앙고백서)등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신학자들이 칼빈 신학
의 중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제 더 이상의 중심된 이론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이 칼빈의 신학의 다양한 내용들이 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칼빈 신학의 중심에 대한 항목들은 대략적으로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절대 주권’, ‘기독론 중심’, ‘연합 신
학’, ‘예정론 중심의 신학’, ‘성화를 강조하는 신학’, ‘하님의 영광
의 신학’, ‘삼위
일체 신학’, ‘성령 신학자’, ‘경건의 신학’, ‘신전
(코람데오) 신학’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많은 의견은 많은 연구의 산실이지만 후예들에게는 적지 않은 혼돈이 된다.
도대체 칼빈 신학의 중심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중심은 무엇인가? 의견은
많은데 손에 잡히는 것은 없는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칼빈 신학을 계승한 후계자들은 다양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서 각 환경에 적
합한 신앙을 체계화시켰지만, 모든 신학을 망라함으로 집중된 포커스를 파악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다양한 신학자들이 내어 놓은 이론들이 칼
빈의 대표적인 신학의 체계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이것은 칼빈의
방대한 작품이 그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칼빈에 대한 그릇된 정보들이 학계
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을 이해할 때에 가장 정확한 이해는 칼빈의 심장을 느끼는 이해가 좋은
이해가 될 것이다. 전반부에서 제시한 것처럼 칼빈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렇게 심장 뛰는 인생을 살았는가? 명망 받는 최고의 엘리트 학생이 총망 받
을 미래를 버리고 도망자의 길에 서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칼빈의 글에
서는 회심에 대한 기술이 없고 오직 시편 주석의 서문의 ‘급작스러운 회
심’(suvita conversio)에서 근거를 찾는다. 자신의 심경과 상황에 대한 진
술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칼빈의 글에서만 칼빈의 중심 사상을 알 수 있다.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칼빈 주변 상황을 통해서 칼빈 신학의
논의를 개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칼빈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제시가 거
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은 칼빈을 이해하는데 부적당한 방법일 것이다.
이는 칼빈이 상황의 이해보다 교리(천상의 교리)의 이해를 더 중요하게 생각
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저작 원칙은 로마서 서문에서 제시된 것으로 ‘간결성과 용이성’
(Brevitas et Facilitas)에 있음은 칼빈의 글로써 확인된 것이다. 간결하게
글을 쓸 때에는 어떠한 부분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상황적인 이해를
줄임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근거에 근접하도록 하였다. 쓸데없는 사색에 빠지
지 않고 오직 경건에 이르는데 힘쓰도록 자신의 글에서 유도하였다.
그런데 시대의 정황을 조합해서 칼빈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칼빈의 저작 원리
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의 평가는 오직
칼빈의 글로만 평가될 수 있
다. 그래서 많은 칼빈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지만 칼빈의 심장을 느끼지 못
한 경우들이 많다. 연구자들이 칼빈의 근본 텍스트를 독서하지 않고 연구하
기 때문이다. 개연성을 강조하는 것은 가쉽(Gossip)은 된다. 그런데 반복되
는 가쉽이 정설이 되는 인간 역사의 오류를 우리를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을 대항하는 진영들이 있었고, 바울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칼
빈에게도 많은 대적들이 있었다. 이 대적들에게 칼빈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
를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신사적인 대적자들은 칼빈
에 대해서 그릇된 평가를 하는 논리를 제시할 것이다.
신학을 평가할 때에는 그의 인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작품을 평가
해야 한다. 그 후에 그의 삶과 인격을 조명해야 바른 신학 이해가 된다. 그
러나 칼빈의 신학은 역으로 그릇된 사료에 의한 인격을 곡해한 후에 신학을
평가함으로써 예정론에 이르러서는 독재자의 전형으로 이해되어지기도 하였
다. 그러나 칼빈에서 예정론은 구원론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였고, 칼빈 사
후에 네델란드에서 벌어진 항론파의 문제제기 된 부분에서
예정론이 확정된
것이지, 전체 신학 부분의 논의라고 볼 수 없다.
중심을 논하면서 서설이 이렇게 긴 이유는 칼빈에 대한 모함과 오해가 얼마
나 많은가? 왜 칼빈을 모함하는 소리에는 우리의 귀와 눈이 솔깃해도, 칼빈
을 칭찬하고 옹호하는 글에는 인색한가? 이것을 개혁 신학의 진영의 참담한
모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에서 믿음의 선배들에 부정적인 자
료들을 올바로 분석하고 사고하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원수를 사랑하
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선배의 과오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직함
을 떠나서 형제애가 없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3. 칼빈은 그리스도인이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 평가할 때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도덕성이
아닌 ‘오직 믿음’뿐이다. 칼빈에게 어떤 믿음이 있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로마 교회, 루터 교회는 칼빈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
나 세르베투스, 볼섹 등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판명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
은 당연히 칼빈을 거짓된 교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
다면 ‘그리스도인’
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가? 그것
은 형제로 평가해야 하고 온유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러
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저작의 가치에 대해서 평가절하를 받았
다. 모든 루터 교회의 역사학자들은 칼빈을 루터의 아류로 평가하였다. 개혁
파 진영에서도 루터의 계승자로 평가하는 부류도 있다.
먼저 칼빈을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한다면 모든 의심과 부정된 생각을 버
려야 참된 형제가 될 것이다. 둘째, 칼빈은 루터의 신학과 상당 부분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루터와 함께 교회를 이루기를 원했다. 그러나
루터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터의 신학이 먼저 유럽 전역에 퍼졌
고, 그 뒤에 칼빈 신학이 전파되어 영국과 네델란드는 칼빈 신학이 자리 잡
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흐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루터 교회의 지반에서 칼빈
신학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루터 교회의 신학에 결정적인 한계를 인식
한 그리스도인들이 칼빈 신학으로 전향한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공통으로
종교개혁의 진영에 속하지만 엄밀한 신학의
부분에서는 다른 체계를 갖고 있
었던 것이다.
서로가 형제이기 서로를 비방하지 않지만, 루터 교회 진영에서 칼빈 신학의
공적을 폄하하기 때문에 서로가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칼빈 신학의 진영은
로마 교회의 신학의 공격성과 루터 교회 신학의 그릇된 해석을 바로 이해해
야 칼빈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있다. 루터와 칼빈의 근본적인 차이 점은 성
경관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칼빈은 성경의 66권의 정경을 정확하게 믿었다
는 것이며, 루터는 에스더서나 야고보서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정경관을 갖
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가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냉혈인인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신교 진영에서도 칼빈의 이미지를 그렇게 주장하는 많은 부류들
은 칼빈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로서 모두가
동류이지 칼빈은 냉혈적인 그리스도인이고, 자신은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된
다는 상상은 버려야 할 것이다.
4. 칼빈의 신학 중심은 예수 그리
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필자는 칼빈 신학의 중심을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
장을 한 신학자의 진영은 거의 칼 바르트의 후계자들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
의 진영에서는 칼 바르트와 칼빈을 연계시키려는 부류들이 상당히 있다. 그
들 때문에 칼빈의 신학이 부흥기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칼 바르트의 후계자들이 자신의 스승을
정통 신학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 칼빈과 연계시키려는 것으로 평가한
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 신학’이라고 채색하였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신학 중심과 칼빈의 신학 중심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칼빈의 신학을 ‘기독론 중심’이라고 주장하고픈 것은 『기독교강
요』의 본문을 독서함으로 얻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에서
‘이중지식’(Duplex Cognitio)이 등장한다. 이중지식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중지식은 ‘주(主,
Lord, 한글 번역에서는 Lord를 하나님으로 번역해서 이해하기 어려움)에 대
한 지식’으로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다. 혹자들은 하나님
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라고도 한다. 이 이중지식은 질적인 차
이 때문에 둘이 한 묶음을 이루어 ‘한 지식’을 이룰 수 없는 관계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성경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 저술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초판 후에 『로마서 주석』을 저술하였고 성경 주석, 설교,
강요 저술이 순환적으로 발전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
다. 『기독교강요』에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제시하
고 있는가”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인
이중지식의 체계로 제시하고 있다.
이 지식은 칼빈이 주창한 지식의 체계가 아니고 정통 교회의 신학 체계를 요
약한 것이다. 중세 로마 교회에서 잠들었던 정통 신학이 칼빈에 의해서 선명
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칼빈은 이 작업을 위해서 어거스틴과 동방교회의
성경 해석을 탁월한 기억력에 의해서 『기독교강요』에서 전개하였다(참고,
서철원,『기독론』).
칼빈은 『기독교강요』1권 13장의 삼위일체 부분에서 성자의 신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하면서 사색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고백에 의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도록 하였다. 그런 면에서 칼빈의 신학을
‘경건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그 경건의 근원이 바로 칼빈을 그리스도인으
로 만드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치는 말
칼빈은 누구인가? 필자의 답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
중심은 칼빈을 변화시킨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에서 구원받아 변화된 예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사랑하고 보호
해야 하며 항상 하나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이었는가? 그렇다면
나의 형제로 사랑해야 한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칼
빈의 가르침은 배격되어야 한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많은 저술은 읽혀져야 한다. 그것이 칼빈이
그렇게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저작을 남긴 이유가 될 것이다. 칼빈
의 가르침은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하며, 나의 구주를 아는 지식과 칼빈이 전
개한 지식은 서로 교제하면서 믿음이 발전하게 되어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잠 27:12) 우리가 칼빈과 함께 연마된다면
더욱더 예리한 성령의 검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칼빈의 탄생 500년
주년이 아닌 주님이 오실 날까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탐구는 변함없이 계
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