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를 동반하는 살아있는 믿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참 기독교 신앙이 행위를 동반한다는 것은 마음에 심긴 하나님의 도가 역동적이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야고보는 신앙과 무관하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을 피하라는 취지에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고 권면하고 있다.
사람 차별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한 몸을 이루며 이 몸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명사들에게만 집중적인 조명이 비춰지고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 그대로 묻혀두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징조가 된다.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고백 또는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 현시된 그리스도의 은혜 등을 뜻하는 일반적 의미를 가진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믿음이라는 말은 은혜를 받았다 혹은 신앙을 가졌다는 뜻을 가진다. 이때 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
믿음이란 통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지시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진리의 체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갈 2:20; 엡 3:12; 빌 3:9). 따라서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의 머리요 중보자이신 그분께 아주 합당한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동등하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이 멸시받을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 역시 멸시를 받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말은 얼굴이 아름다운 것에 취하고 압도당하여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탄한다는 말로 동일한 상황에서 서로 차별을 두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특히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외면을 보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외적인 훌륭함 때문에 이들을 존경하는 것도 포함된다.
세상적인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는 태도는 영광의 주님 앞에서는 용납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태생, 인종, 성별, 학벌 혹은 가난 때문에 타인을 경멸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믿음을 부인하는 행위와 같다.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이유라 할지라도 차별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잊지 말자.